이미 소금과 빛이 된 성도(16)
이미 소금과 빛이 된 성도(마5:13-16)(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 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 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 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 리게 하라
최근에 여러 분들과 복음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진리를 더 알고 싶은 마음을 엿볼 수 있어서 참으로 고마운 마음이었습니다만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을 자기중심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아마 적지 않은 분들이 생각하기를 구원을 받고 난 이후에 가만히 있으면 안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무슨 일인가 해야한다라고 믿는 마음은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복음을 믿는 성도는 '구원이라는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다'라는 신앙사고로 방향이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구원은 나로부터 시작이 되지 않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순간에도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고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도 나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해야만 속이 시원하고 존재감을 느끼는가 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는 즐거움은 별로 달갑지가 않은 모양입니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하면 그에 대한 보람을 느끼고 싶어 하지요. 그래서 그 일의 결과에 따라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실망을 느끼기도 합니다. 기쁨을 느낀다면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성취감으로 다가오고, 실망을 느낀다면 자괴감을 맛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행위의 댓가를 자기의 의로 규정합니다. 그 모든 것이 자기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원 이후에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일에 참여만 하시면 됩니다. 그 일이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차지하십니다. 성령의 감동을 얻는 성도라면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일인지 내가 시작하는 일인지는 구별할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흐르는 강물에 떠있는 배가 흐르는 흐름에 따라 흘러가듯이 하나님의 강물에 흐르는 대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고민 하셔야 될 것이 있는데 '내가 성경속의 예수님을 바로 보고 믿고 있나?'하는 것입니다. 내가 문자로만 공부하고 연구해서 보는 그런 예수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으로 보는 예수 말입니다. 성경을 잘못 읽으면 예수를 보긴 보는데 '다른예수'를 보기 쉽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잊으시면 안됩니다. 문자로만 읽고 이해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에 집중하시고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읽기 위하여 기도하셔야 될 줄 믿습니다.
이제 마태복음강해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 서로 다른 처지와 환경일지라도 인격이나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서로가 양보할 것은 하고 존중할 부분은 해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상대를 위한다기보다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방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서로 간에 자기주장을 강하게 주장하다가 상대에서도 강하게 나오면 서로 타협점을 찾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점잖은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지고 그대로 하나님과 상대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엎드려 경배해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 엎드려 경배한다는 것은 실제로 엎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주장, 자기 자존심을 전혀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엎드려 경배하는 그 모습에 하나님의 말씀만 임할 뿐입니다. 그 말씀에 대꾸할 이유도 없거니와 처지가 아닙니다. 그저 엎드려 경배할 수 있는 인간이 된 것만으로도 행복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그것뿐입니다. 더 욕심을 낼 이유가 없습니다.
나라고 하는 죄인이 엎드려 경배하는 자체가 행복인데 어떻게 더 큰 행복과 기쁨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은 사고방식이 이와같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던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는 엎드려 경배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져야 참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피조물이 아닌 상태에서 세상에서 사람과 만나면서 타협이나 양보를 하던 그런 생각으로 하나님께 타협하려고 하거나 무엇인가 양보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난다면 그것은 신앙이라고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불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본인이 할 수 있는 것만 골라서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느 한 말씀이라도 우리가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죄인으로서 하나님앞에 엎드려 경배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람 대하듯이 하는 사람들은 자기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려고 노력 중이니까 그 노력을 가상이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벌을 내리시면 안된다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이나 하나님이나 누구한테도 엎드려 경배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대단히 신경을 쓰면서도 하나님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내가 잘나서 구원받는 방식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엎드려 경배를 한다고 하더라도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엎드려 경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 행동에 따라서 다가 오시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냥 소금이요, 그냥 빛으로 아예 규정해 버리십니다. 엎드려 경배한 댓가로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소금이라고 선언해 버리고 빛이라고 선언해 놓으신 상태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빛의 노력을 할 경우에만 계속 빛이라고 해줄게"가 아닙니다. "착실히 노력해서 소금 노릇을 잘 하고 있을 경우에만 소금이라고 봐 줄게"가 아닙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모든 것을 이미 아시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행함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규정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수나, 실패나 잘못이 있더라도 소금이 아닌 것이 아니요 빛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은혜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도의 잘못이나 실수를 가지고서도 여전히 소금과 빛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의 모습을 소금과 빛으로 표현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둘 다 영원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겔43:24에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에 소금을 치는 것은 그렇게 해야 제물의 맛이 나기 때문입니다.
제물에도 맛이 나야 한다는 말은 제물을 하나님께서 잡수시는 음식이라는 차원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을 '응식'이라고 합니다. 레2:12-13에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물의 소금의 의미는 그냥 소금이 아니라 '언약의 소금', 즉 '언약된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금이 빠져버리면 하나님의 약속과 상관없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꼭 소금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민18:19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 도저히 변할 수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제물에 소금을 뿌렸다는 것입니다. 즉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 번 뿌려지게 되면 인간에 의해서 변질되거나 수정되지 않는다는 확고한 의지입니다.
이러한 소금의 기능은 예수님께서 지옥을 말씀하실 때도 나옵니다. 막9:47-50에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지옥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벌을 내리실 때에는 마치 맛을 잃은 소금을 다루듯이 불로서 징벌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 지옥의 벌이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소금을 예로들어서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의 원칙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이런 변하지 않는 원칙에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사명을 띠고 있습니다.
빛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두움은 빛이 나타나기까지는 자신이 어두운지 아니면 어둡지 않던지 조차 분별이 안되는 세계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빛이 되는 성도들이 세상에 나옴으로서 비로소 세상은 참으로 어둡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가 빛이 되고 소금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말씀일까요? 고차원적인 윤리나 도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이 세상에서 진정한 소금과 빛으로 먼저 오신 이가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의 말씀과 행동이 이 세상을 향하여 유일하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오셨고 어떻게 활동했는가를 세세히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나타나자 세상의 모든 세력은 그 분을 세상에서 몰아내려고 아주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생소한 소금과 빛이신 예수님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그 어떤 세력의 힘이나 회유에도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은 하나님 아버지께만 경배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소금의 역할과 빛의 역할을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신 분이 아닙니다. 세상이 두렵지 않았고 세상 문제 때문에 고민에 빠지신 분도 아닙니다. 그저 소금과 빛의 역할만 충실할 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으로 만족한 분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소금과 빛의 역할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으로 환영을 받고 인정을 받아서 이 세상에서 교회나 짓고 선교 사업이나 벌리는 것이 소금과 빛의 역할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초청하거나 호응하지 않더라도 그저 담담하게 빛이 이미 되었음을 보여주고 이미 소금되었음을 보여줄 따름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모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그 행복으로 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은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지마시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지는 소금과 빛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