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맞는 우리의 기도(24)1
현실에 맞는 우리의 기도(마6:5-8)(24)1
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 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 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 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구제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겨서 구제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우리 같은 죄인들의 본능은 구제를 통해서라도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죄를 저지를 수 있는 도구로 여긴다는 것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은밀한 구제를 강조하시면서 진정한 구제는 죄인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선한 일이라는 것을 함께 은혜 나누었습니다. 은밀한 구제는 예수님께 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아무도 몰랐고 동방박사들과 목동들, 선지자 안나에게 나타나셨듯이 복음을 통한 구제는 이 시대에도 은밀하게 하늘에 속한 성도에게만 구제 될 것입니다. 그 구제는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기도입니다. 성도의 호흡이기도 하고 하나님과 대화라고도 하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시는지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능히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분임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모르면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또한 그 분의 소중함을 모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는 어디에 숨어 있을까요? 혹시 나쁜 습관이나 좋지 못한 태도에 숨어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기도에 대하여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라고 하면 신앙인의 필수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라고 볼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서도 얼마나 많은 죄를 지을 수 있는가를 그 어느 누구라도 짐작조차 못할 것입니다.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은 거룩하고 아름답게 보일텐데 예수님은 단호하게 "하지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기도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겁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기도에 대해서 예수님과 같은 시각으로 보지 못할까요?
그것은 예수님과의 안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영적인 사람이 아닌 상태에서 기도를 하는 그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지적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관점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요20:19-20에 보시면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이 말씀은 지금 예수님이 죽으시고 난 후에 제자들만 남은 상황입니다. 제자들에게 현실은 자기들만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따른 지 3년 만에 그동안 기대했던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끝나버린 것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을 대신하거나 자신들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지만 현실의 끝은 또 다른 현실의 새로운 시작이었는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예수님이 죽음이라는 현실을 벗어버리시고 다시 살아계신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진짜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이 "평안하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겪었던 현실과 전혀 다른 현실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3년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주님이 늘 하시던 말씀을 그저 지나가는 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고 난 뒤에는 예수님의 하신 모든 말씀이 앞으로 자기들의 현실을 이끌 말씀이었던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나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과 관련되어 있지 않은 다른 현실은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도리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현실이 사실은 모두 허구요 환상에 불과한 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이라는 말입니다. '영적'이라는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만드신 새로운 현실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신비스러운 환상을 본다든지 꿈을 꾼다든지 하는 유치한 체험과 동일시하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믿어지는 것이 곧 영적입니다. 예를 들면 도마라는 제자가 '자신의 눈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친히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때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 속에서의 영적으로 사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이제 이러한 영적인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다른 현실은 현실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이것만이 진짜 현실입니다.
바로 이런 영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말씀하는 기도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점을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남편의 성공을 도와 달라는 내용, 자식들 잘 되게 해달라는 기도, 병 낫게 해달라는 기도 등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게 해달라는 기도는 영적인 기도가 아닌 이방인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인 관점이 없이 기도를 하게 되면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우선 자기에게 어려움이 오지 않으면 기도를 안하게 됩니다. 기도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아쉬운게 없는데 무슨 기도할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그러다가 괴로운 일이 일어나면 '내가 그동안 기도를 안해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구나'라고 생각해서 그제서야 기도를 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봐야 될 것이 있는데 사람이 괴롭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무작정 자기 뜻만 고집하다보니까 현실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서 주는 괴리가 곧 '괴로움'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안목으로 보게 되면 이 세상을 부활하신 예수님이 쥐고 있다면 괴로울 것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어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처음부터 거부하니까 교회를 다니고 기도하는 것이 기껏해야 나의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는 정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도 그리고 부활의 현실에 관심조차 없습니다. 단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어떻게 채우나 하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현실이 무엇입니까?
자녀들이 장래인가요? 남편일이 좀 안정되는 것입니까? 나의 계획이 모두 성사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지금 우리 곁에 계시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이라서 나중에 죽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세요.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은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 것들입니다. 지금 안심하고 행복해 하는 것도 역시 세월이 지나면 다 부서질 것들입니다. 잊혀지고 부서질 것들을 붙잡으려고 모으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현실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헤매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기도는 모두 비현실적 세상에서 자신을 채우려는 행위로 보시고 이방인과 같이 여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현실에 맞는 기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옆에 계시는데 언제까지 현실이 아닌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며 간구를 해야 하겠습니까? 현실을 제대로 보고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만이 할 수 있는 기도를 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는 현실을 바로 보고 사는 영적인 백성들의 몫인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