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두 주인은 없다(28)

박성산 목사 2016. 2. 15. 12:09

두 주인은 없다(마6:23-24)(28)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 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 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 니하냐

 

 

 

 사람의 근본은 생명이 아니고 죽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죽음의 그림자라고 볼 수 있는 죄와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가진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죄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그 길을 가는 방법밖에 없는데 문제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도무지 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다른 말로 '보호'와 '도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늘 돕고 또 보호해 주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 죄와 고통을 극복해 보려고 하는 시도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떠한 난치병도 고치고 장수해서 인간이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달나라도 가는 세상인데 노력하면 안 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과 지혜로 무엇인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나는 죄를 지어서 누구로부터 멀어졌는가' 하는 점을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칫 인간중심의 삶에 익숙해져 버리면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수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내가 세상의 주인이지 나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의식이 전혀 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보면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과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인'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지게 될까요? 기분 좋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창세기3장을 통하여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보면 인간의 실체가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면서 결코 혼자서 살 수 있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살 수 있게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함이나 만족함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있을 때에만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그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버렸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은 아담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본래의 주인 노릇을 하고자 하십니다. 보호하고 도와주시려고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백성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입니다. 어떤 이는 성도를 가리켜 '제3의 종족이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요1:13에서는 '오직 하나님께서 난 자들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전2장에서는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표현하던 성도는 분명히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이것을 교육으로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존교회에서는 무슨 프로그램들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인간 편에서 그 어떠한 노력과 온갖 수단을 써 봐도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는 이상 불가능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감' 또는 하면 된다라고 하는 '가능성'이라는 헛된 희망으로 살지만 성도는 오직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도움과 보호를 잊을 수 없고 놓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저와 여러분을 책임지고 구원해 줄 것이 뭐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평생 선한 사업에 헌신했다고 해서 그 사업이 우리를 구원해 줄까요? 오지에서 이름없이 남을 위해서 청춘을 바쳐 의료로 봉사를 했다고 그 일이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을까요? 일평생 교육을 위해서 애써온 훌륭한 교육자를 그 제자들이 구원시켜 줄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평생 대기업을 세우는데 몸 바쳤다고 그 재물이 자신을 구원해 줄까요? 물론 그들의 삶 속에서 나름대로 보람은 있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람들은 자신이 쳐놓은 울타리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대접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을 길게 봐야합니다. 결코 우리의 죽음이라는 높은 담벼락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나약함과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오랜만에 식구들과 늦은 밤에 따뜻한 눈물을 흘리면서 본 영화입니다. 시골에 사는 노부부의 삶과 헤어짐의 내용입니다. 눈을 서로에게 던지면서 장난도 치시고 손이 시려우면서도 '첫 눈을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는 속설을 실재로 믿는 양 서로에게 먹여주시는 아름다운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러나 그런 행복함도 잠시 할아버지가 노환으로 돌아가십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입었던 옷과 먼저 간 자식들의 옷을 무덤 앞에서 태우시고 쓸쓸하게 외로이 눈물을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 마지막입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누가, 무엇이 구원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의 상반되는 재물과 하나님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25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진정 우리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음식도 아니고 옷도 아닙니다. 목숨입니다. 그런데 먼저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요1:3에 이와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여기서 '그'란 곧 예수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 생명의 원천이시고 동시에 그가 없이 만들어 졌거나 살아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진 사람은 생명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목숨보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즉 재물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죽은 목숨이 계속 이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결책을 꺼내 놓으십니다.

오늘 본문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시면 '사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다른 표현으로 이어서 '더 중요하게 여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은 두 가지를 똑같이 중요시할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를 더 중요시 한다는 말은 곧 다른 하나는 덜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특징은 둘을 용납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둘을 동시에 똑같이 사랑하는 것은 처음부터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진정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은 다 제외시키고 오직 하나만 남겨두고 그 하나만을 보물로 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진정 사랑을 하는 것은 질투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사랑할 때에 상대에 대해 어떤 목적으로 다가갈까요? 그것은 '보호'입니다. 즉 사랑의 모습은 '보호'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성을 사랑할 때는 비록 자기보다 그 여성이 힘이 좀 더 센 여성이라고 할지라도 자꾸만 보호해주려고 합니다. 반대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때는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자꾸만 멀리하려고 합니다. 비보호입니다. 무관심입니다. 여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몰라라 합니다. 그럴 때에 여성은 직감적으로 "저 남자가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재물을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인으로서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까? 다른 것은 없어도 이것만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 진정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분은 예수님의 이름인 줄 믿습니다. 그 분은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얻었다는 그 사실만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요11:25~26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 모두 이 세상의 것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주인으로 삼아서 영원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복락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