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돼지의 의미(32)②
개와 돼지의 의미(마7:6)(32)②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 려하라
지난주에 이어서 개와 돼지의 의미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개와 돼지와 같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신앙이 없는 분들이 들으면 기분이 나쁠 얘기입니다. 하지만 할 수 없지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말씀은 아니고 거룩한 것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이 세상의 것만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뜻에서 개와 돼지로 본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를 살펴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티브이에서 강아지를 키우는 프로그램들이 늘고 있는데요. 주인이 강아지에게 생일선물로 예쁜 분홍색 리본을 하나 달아주었다고 생각해봅시다.
물론 선물한 주인은 마음이 흐뭇하겠지만 강아지가 그 리본으로 인해서 즐거워하고 주인에게 고마워할까요? 아마 리본이 강아지의 머리에 얹는 순간 귀찮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강아지는 리본이 무엇인지, 왜 머리에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멀쩡한 사람에게 개와 돼지라고 표현하신 의미는 그만큼 거룩한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말로는 억만금을 준다고 하더라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에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씀을 부정하거나 거절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보기보다 개나 돼지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개나 돼지는 놀이가 따로 있습니다. 먹는 것 외에는 관심거리가 없는 것입니다. 개가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돼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말씀을 무시하면서도 하나님에 의해서 사람으로 대우받고 싶다는 사람은 마치 개나 돼지가 사람으로 살겠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시49:2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 말씀은 거룩한 말씀을 가지거나 듣고 있으면서도 거룩에 대해서 아무런 감동이 없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잠12:1에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경우에 어떤 사람이 짐승이라고 판가름 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거룩한 말씀을 하시고 있는 예수님을 거룩한 분으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짐승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전혀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개와 돼지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내가 바로 개와 돼지와 같은 짐승'인 것을 깨닫는 자들이 곧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을 바로 깨닫는 사람은 성도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벌거벗은듯한 수치스러움을 드러내는 것이 두렵다고 생각된다면 성도로서 아직도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은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당연히 남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되어야 마땅하고 수치와 조롱을 받아 마땅한 인간이다"라고 여기며 살아간다면 어느 한 순간도 감사하지 않는 마음은 없을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조금 이해가 안 되시더라도 조금만 더 들어보세요.
사실 죄를 짓는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만큼 괴롭고 힘든 것은 없지요. 다른 사람들 눈에는 죄와 싸우는 거룩한 전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마귀가 쳐놓은 덫에 걸려서 발버둥을 치는 것과 별 다를 바가 없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의 유혹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과거보다 현재가, 현재보다 앞으로 더 성장하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그 마음 자체를 의미합니다. 어찌보면 우리 모두의 삶의 낙이라고도 볼 수 있는 성장이 마귀가 주는 유혹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점점 나아져 가는 자신과 삶의 질이 좋아지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모토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마귀의 유혹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야 목사의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담이 타락하고 난 뒤에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이상하게 변했습니다.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에 결심을 하고 스스로 자제를 하면 할수록 자꾸만 그 죄를 짓고 싶은 충동이 자신의 결심을 결국 허물고 만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즉, 스스로 자신에게 법과 규칙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지켜내겠다고 결심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은 그 자체로서 이미 마귀의 유혹을 자기 마음속에서 잡아당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한 평소에 술을 먹고 싶지만 기독교 신자라는 명분 때문에 100일 동안 꾹 참고 지내면서 호시탐탐 우연을 핑계로 술을 마실 기회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하는 사람이 술을 마실 가능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다른 한 사람은 이미 수십 년 동안 매일 같이 술에 젖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다 또 한 병의 술을 더 먹는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도, 짜릿함도 못 느끼는 사람이 100일 안에 술을 마실 가능성이 더 있겠습니까?
첫 번째 예를 든 사람은 아마 이런 심정일 것입니다. "나는 신자이다. 더욱이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신자이다. 나는 이 땅에서 바르게 살아야 될 임무가 있는 신자야. 세상은 썩어도 나만은 썩지 말아야 돼. 주님, 저를 이 땅의 빛과 소금으로 삶을 살게 해주세요. 마귀가 나에게 술로 유혹을 해도 마귀의 코를 납작하게 그 유혹을 이기고 말거야" 이런 사람은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타입입니다. 마치 손들고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같지요. 왜냐하면 이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미화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열심히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규칙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은 속을 보시는데 그는 겉 단장에 신경을 쓰고 있으니 그야말로 거룩한 분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짐승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두 번째의 경우는 평소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나? 나는 개야. 나? 나는 돼지야. 돼지가 돼지짓거리를 한다고 해서 더 돼지 되는 것도 아니고 돼지가 경건의 흉내를 낸다고 의인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니잖아. 그래서 평생 지금 이대로 개나 돼지로 살거야. 내가 구원을 받고 못 받고는 오직 거룩한 분의 자비와 용서에만 달려 있을 뿐이야."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두 번째의 경우 너무 무책임한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하지만 이런 사람은 악마가 유혹할 틈이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처사만 기다릴 뿐이지 자신의 노력으로 죄를 짓지 않겠다든지 신앙의 삶이 성장되기를 바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신앙의 성장을 소망할까요?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거룩하라고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있을까요? 그래야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구요?
여러분,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우리를 통하여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은 죄 밖에 지을 줄 모르는 우리에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늘 행복하지 못하고 불행이 찾아올까봐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첫 번째 예를 든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사2:22에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코를 막고 있으면 몇 분도 채 되지 않아서 호흡이 멈출 인생에 무슨 희망을 걸겠다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전3:18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우리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십자가 목걸이를 받으면 행복하고 좋아하면서 그 십자가의 실상인 예수님의 피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 봐야겠습니다. 어찌보면 우리는 환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일은 좀 나아지겠지'하는 희망 말입니다.
일평생 목욕을 한 번도 안 한 사람에게 예쁜 드레스나 흰 양복을 입혀놓고 "너는 나아질 수 있어. 기도 많이 하고 교회에 죽도록 충성하다보면 신앙은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되는 거야. 그러면 하나님께 칭찬받고 얼마나 좋아. 하나님이 너를 반드시 높이 들어 쓰실거야."라고 마귀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우리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은 잊지 말아야 할 줄 압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에 처참하게 달리신 예수님의 운명과 동일시하면서 보다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그 환각의 커텐을 걷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똑바로 보셔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도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러니까 호기심에서 일부로 더 죄지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우리가 구원받아서 의롭다라고 칭함을 받은 것은 오로지 거룩한 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 피 뿐입니다.
우리는 평생 이 보혈의 피만을 자랑하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