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34)
좁은 문(마7:13-14)(3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 이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에 '멸망'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우리가 부담을 느끼는 말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우리들에게 '멸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떠한 가정에서 엄마는 불교, 아빠는 기독교, 딸은 천주교를 믿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조금은 불편해 보일 수는 있겠지만 가족 간에 불화가 없는 이유는 내가 가진 종교보다 가족이라는 것이 최우선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가족이 깨어질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이나 '멸망'이라는 말은 서로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만큼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단어가 바로 '멸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멸망'이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설교 서두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진정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예수님께서 이 멸망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취지도 함께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길'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창3장에 보시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음으로 에덴에서 쫓겨난 곳이 저주받은 이 세상입니다. 따라서 사실상 천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과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길 없음'에 대해서 사람들은 별로 답답해하지도 않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 외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게임하느라 정신이 없는 청년에게 "당신이 가야될 길은 이쪽입니다."라고 한다면 그 청년은 길을 안내하는 분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게임에 열중할 것입니다. 이 청년만 그럴까요? 우리 모두 그렇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가야만 할 '길'이나 '문'에 대해서 아무리 자세히 얘기를 해봤자 사람들은 전혀 관심 밖입니다. 차라리 예수님께서 진정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면 우리들이 필요한 복을 원 없이 주시기만을 기대할 뿐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길'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 '행운'이나 '축복'이 아쉬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멸망의 길', '생명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피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의 욕망을 위하여 전혀 이 길에서 떠날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삼을 생각만 합니다.
골3:2~5에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이 탐식이며 곧 우상숭배"
이 말씀을 대하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 우리가 땅에서 태어나서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나요? 어떻게 보면 우리는 욕심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욕심의 땅에서 살다가 욕심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더라도 세상, 땅을 쳐다보고 있다면 모든 것이 욕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상숭배자인 것입니다. 그 어떠한 무소유의 삶을 사는 인격자라고 할지라도 이 덫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면서도 종교를 만들어서 더 큰 복과 영생을 가지려고 합니다. 결국 종교는 인간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종교로 생각하는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한다든지, 전도를 한다든지, 봉사를 한다든지 이러한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서 축복과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런 생각 자체가 곧 땅의 것에 관심을 두는 탐심이요, 우상숭배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아무리 아름답게 집을 지어도 모래 위에 지은 집이기 때문에 비가 오면 금방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속의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영생을 알려주실까요?
구약의 홍해가 갈라지던 시대로 돌아가 보시면 그 때 모세와 함께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은 절망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쳐들어오고 앞에서 홍해가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길'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 우리와 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도 약1:15의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게 됩니다. 이것은 곧 절망을 의미합니다. 무슨 일을 하거나 갖은 방법을 다 써 봐도 욕심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밖에는 답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절망적인 자리에서 길을 만들어내십니다. 홍해에 흐르는 바닷물을 양쪽으로 가르시고 그 한가운데로 길을 트신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저 목숨은 애굽 군대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탄식만 남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절망을 느끼게 하심으로 길은 하나님만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을 보면서 길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리는 것을 깨달아야 할 줄로 압니다. 우리는 길을 만들어 봤자 욕심이라는 길 외에는 만들 줄 모르는 바보들 아닙니까? 길은 길 되시는 분이 만드셔야 안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이 진리요 생명이요 길이라고 하시면서 요14:6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진리와 생명의 길을 원하지 않는 것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존에 가고 있는 길을 버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욕심이라는,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자신을 위한 욕망 말입니다.
좁은 문은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기쁨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절망을 느꼈을 때 자기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돌파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생명은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하며 예수님만 의지 하겠다고 모든 것을 맡기는 성도가 바로 좁은 문으로 가는 것입니다.
좁은 문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