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죽음을 자는 것으로 보는 성도(47)

박성산 목사 2016. 7. 11. 00:50

죽음을 자는 것으로 보는 성도(마9:18-26)(47)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 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 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 옷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 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 라

23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 리를 보시고

24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 시매 일어나는지라

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이 세상 사람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이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두 다 죽이시는 반면에 또한 우리를 살리시는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보면서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죽음을 생각하면 허무만 남는 것이 인생인 것 같습니다. 막연하게 내일을 기다리며 하루살이처럼 살다가 목숨이 다하면 그동안의 희노애락이 모두 사라지는 허무를 향하여 사람들은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 뒤에 다시 산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영역 밖의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지요.

 

오늘 본문 24절에서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소녀가 죽었다고 말하는데 예수님은 ‘잔다’라고 하는 관점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잔다라고 하는 것은 곧 깨어날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체험을 해야만 신자라고 믿는 것입니다. 물론 체험은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기적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방언이나 병을 낫는 체험을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실 때에는 반드시 최종적인 어떤 모델의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가 하는 점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수많은 기적들은 어떤 모델을 가리키지 위한 것이지 단순히 병을 고치거나 하는 데에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16:4에 보시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는 기적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최종적인 모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나 혈루병에서 낫는 것이 장차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것을 예고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물론 물 위를 걷는 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리고 12년 동안 하혈하는 병이 나은 것도 놀라운 일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것들보다 더 크고 놀라운 기적은 예수님께서 부할하신 기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이 기적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12년 동안 하혈을 한 여인은 병은 나았지만 결국 죽습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 소녀도 결국 몇 십년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병이 나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다시 죽는데 말입니다. 조금 일찍 죽거나 불편함을 안고 살다가 죽은 것 밖에는 다른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이라고 하는 기적이 바로 내가 포함될 기적이 확실하다면 죽음의 그림자에 불과한 병 앞에 주눅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눅16:27-31절에 보시면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지옥에 가 있는 부자와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과의 대화입니다. 그런데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면서도 부자는 여전히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기적에 대한 오해인데요.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면 죽은 부자의 형제들이 이 기적을 보고서 아마 회개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자의 요청을 거부합니다. 31절에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모세와 선지자의 모든 말씀을 이루신 분, 즉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 아무리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 할지라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기적을 베푸는 분의 속성이 그대로 담겨 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제대로 알고 믿는 사람은 이미 예수님의 영역(회개)에 속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단순히 병 낫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방언하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예수님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믿는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영역에 속해서 반드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란 이런 예수님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성도만이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죽은 소녀를 보고서 ‘잔다’라는 인식을 가진 성도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을 볼 때에 비록 아직 몸이 아프지 않고 살아있다고 할지라도 이미 죽은 자와도 같다고 하는 관점을 갖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있는 관점에서 예수님을 이해하게 되면 전혀 다른 예수님으로 받아드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살아있는 나의 모든 일이 잘 되고 만사가 자기 뜻대로 잘 되기 시작하면 예수님이 오히려 귀찮아지고 거추장스러워 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기 입장에서 세상을 보지 말고 예수님 입장에서 다시 세상을 보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원래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 수 있는 기적은 예수님의 은혜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았다면 이 세상을 죽은 자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마지막 날에 우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활의 아침에 깨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은혜가 여러분에게 함께 계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