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49)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마9:35-38)(49)
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 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 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마13:38-40을 보시면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좋은 씨와 가라지는 이미 갈라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좋은 씨는 가라지가 될 수 없고 가라지는 좋은 씨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마귀가 좋은 씨를 뿌릴 수는 없지요. 가라지만 심을 따름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미 정해져 있는 추수때에 주님 앞에서 알곡으로 창고에 들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행복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추수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세상을 마무리 짓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 심판을 바라지도 않을뿐더러 요구한 것도 아니고 마냥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영원히 평화롭기만 바랄뿐입니다. 나 하나 편하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때가 되면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가라지는 불에 태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추수하시겠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알곡과 가라지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닐까요? 가라지는 가라지의 기준이 있을 것이고 알곡은 알곡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그 누가 가라지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요.
그럼 추수하시겠다는 의미에 대해서 좀 더 말씀을 나누겠습니다.모든 사람은 자신이 노동한 대가를 기대합니다. 그 대가를 통해서 자기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판가름을 하기도 합니다. 다른 말로 자신의 가치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신이 기대한 만큼의 대가가 돌아오지 않으면 실망하기 마련인데요.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함에 따라서 신자들에게 칭찬받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도 칭찬과 더불어 영생을 얻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희망사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만약에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내가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나를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의 성도는 영생이 우리행위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대가로 주어짐을 아는 자입니다.
창3:17-19에 보시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인간은 본래 흙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이점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흙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말은 세상이 인간의 수고로 만들어 진 것이 하나도 없을뿐더러 스스로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흙이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관점에서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흙에서 난 존재를 흙으로 되돌리는데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께 그 어떠한 원망이나 따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학교에서 미술 시간에 진흙으로 인형 만들기를 해서 예쁜 인형을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인형들이 파란 드레스를 입혀 달라든지, 눈을 크게 해달라든지, 심지어는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한다면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우리에게 이롭게 하실지 아니 하실지는 순전히 하나님의 권한에 속하는 문제이지 우리가 어떠한 요구를 할 입장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본인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고 심지어 자신을 신으로 삼아 세상을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되기를 바라는 희망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흙으로 돌아가야 될 원인제공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저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비록 흙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서 새로 지음을 받는 일입니다. 즉, 성령을 받는 일인데요. 이 외에는 저주의 틀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주해 놓으신 틀에서 스스로 해쳐 나올 수 있는 사람은 한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롬8:9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 즉, 그리스도의 사람을 알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외의 모든 사람은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존경받더라도 가라지입니다. 옴 몸을 던져서 빈민촌에서 자신을 희생한 아주 귀한 일을 했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가라지일 뿐입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고아원에 맡겨서 불쌍한 아이들을 보살피는 아름다운 일을 하더라도 예수의 영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알곡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나를 왜 알곡으로 만들지 않고 가라지로 내버려 두었는지 하나님께 원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원래 흙이었다는 본질만 알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자체를 감사할 수 있을 줄로 압니다.
추수를 계획하지 않는 하나님의 일은 없지요. 그러므로 추수의 의미는 이미 계획해 놓은 일에 대한 성과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셔서 조금도 빈틈없이 추수를 하실 것입니다.
요4:35-38에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추수는 가라지들에게는 두려움과 심판으로 다가오겠지만 알곡에게는 영광의 순간입니다. 일한 것도 없고 수고도 한 것이 없지만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햇빛을 통하여 자라게 하신 은혜로 말암아 알곡이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 모두 알곡으로 예수님께서 추수할 때에 영생에 이르는 기쁨을 함께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