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예수님의 구원관(57)②

박성산 목사 2016. 9. 25. 21:55

예수님의 구원관(마11:1-10)(57)②

 

 

1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 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 에게 고하되

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 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 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 시니라

7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 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 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

 

 

 지난주에는 우리가 어떠한 구원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가에 진단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구원관을 예로 들어 말씀드렸는데요. 자칫 구원관을 잘못가지게 되면 철장속에 자신을 가두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죄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내일은 그런 죄를 짓지 말아야지’ 라는 오늘을 반성의 차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알면 알수록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죄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사랑인지를 아시는 귀중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세례요한의 구원관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마3장이나 눅3장에서 보면 세례 요한의 구원관에 대해서 잘 나와 있습니다. 그 현장을 상상해 보면 아주 다급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오늘 해결하지 않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도끼로 비유를 들면서 열매가 없는 나무가 찍히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같은 종교계의 지도자라고 할지라도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직분으로 구원이 된다면 차라리 하나님께서 돌멩이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것이라고 세례요한은 외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물로 세례를 베풉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물로써 세례를 주지만 장차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지금 세례를 주는 것은 그 분의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는 곧 이 세상을 둘로 나누시는 심판주이신데 알곡은 천국 곡간을 채우지만 쭉정이는 불에 태우실 것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렇게 말하니까 사람들은 겁이 나서 세례요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당한 열매를 맺겠습니까?’ 당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동으로 합당한 열매를 만들어야 되는가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눅3:10-14에 보시면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지금 우리가 그 당시에 있었더라면 무엇을 했을까요? 물질을 나누거나 옷을 나누어 줄 수 있겠지요. 그러한 것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알곡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니까요. 곧 심판이 가까이 오는데 오늘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과 옷가지들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세례요한이 이런 식의 구원론을 언급하는 것도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마3:3에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사40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서 메시야와 그의 심판을 알리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66:2-3에 보시면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많은 예물을 바쳐서 제사를 드렸어도 그런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한낱 짐승의 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말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통회하는 심령만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사1:10-17에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사야 시대나 현재나 별 다를 것이 없다고 판단한 세례요한은 당연히 회개와 더불어 합당한 열매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예수님의 불심판이 있을 줄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조용합니다. 그래서 옥에 갇혀 있었던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뭘 하시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서 묻습니다. 본문 3절에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본문 5-6절에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세례요한의 생각으로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소경되고 귀머거리가 되고 문둥이가 되며 앉은뱅이 된 자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눈을 뜨지 말아야 하고 말을 못해야 하고 저주를 받아서 지옥불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고쳐주시면서 이 사람이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구분하지 아니하시고 그냥 낫게 하십니다. 소경도 마찬가지이고, 귀머거리도 마찬가지이며 죽은 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자신의 은혜와 용서가 그대로 그들을 덮어서 무조건 구원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즉, ‘너는 무슨 죄를 지어서 그런 병이 있는거니? 어서 회개를 해라 그러면 고쳐줄게’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설교 할 때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회개할 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임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점차 나아지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리어 세월이 갈수록 자신의 죄성을 더욱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도 용서의 하나님이듯이 마지막까지도 하나님은 용서로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되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어느 정도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구요?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목숨이 빼앗겨도 후회스럽지 않을 정도로 명확하게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불안합니다. ‘오늘은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데 지으면 어떡하지?’라며 항상 조심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궁금하십니까? 제가 말씀드리지요.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바다에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