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의 기준(67) ①
심판의 기준(마12:30-32)(67)①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 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 지 못하리라
오늘 말씀은 참 이해하기가 힘든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인자는 거역하더라도 죄를 사하시는 분이지만 성령을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떤 분은 이 말씀을 가지고 성령훼방죄를 지으면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럼 어떤 죄를 성령훼방죄라고 할까요? 오늘은 여러분이 복음을 좀 더 깊이 아시는 귀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어려운 부분은 예를 들어가면서 증거 할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아마 2주에 걸쳐서 말씀을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은 끊임없이 싸우는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싸움의 여파가 십자가 죽으심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끊임없이 싸웠던 것처럼 너희들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싸우시는 대상을 알아야하겠지요. 그래야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12:14에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이 말씀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여야 하는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좀 너그럽게 이해해 가면서 양보할 것은 서로가 조금씩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배려해 주면 서로가 좋지 않을까요? 그러면 싸울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싸울 수밖에 없는가를 본문을 통하여 볼 수 있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심판주입니다. 심판주로서 이미 확정된 심판의 기준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세상과 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변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변하지 않는 것을 붙잡은 사람은 그것에 생명을 걸어도 전혀 손해는 아닐 것입니다. 과연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그러면 변하지 않는 심판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본문31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라는 말씀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무조건없이 용서하신다는 말씀은 아주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용서는 언제 하셨다는 말씀일까요? 어떠한 죄일지라도, 무슨 죄라도 그냥 용서해주신다는 말씀은 사실 우리자신을 되돌아보면 가당치도 않는 말씀이잖습니까? 우리는 우리자신을 잘 압니다. 어떤 사람인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랍니다. 만약에 어떤 죄는 용서를 받지만 어떤 죄는 용서를 못 받는다면 용서의 의미가 있을까요? 용서라는 것은 죄를 분명히 지었는데 죄를 짓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가던 여중학생을 흉기로 아무런 이유없이 헤쳤다고 합시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픈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겠지요. 범죄자는 자신이 적어도 무기징역이거나 사형을 당할 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피해자 부모가 그 범죄자에게 찾아와서 용서하겠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용서는 가능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율법이라는 기준을 정해 놓고 지키면 복을 주지만 못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고 숱하게 말씀하셨는데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용서라는 것을 이미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라는 말씀을 믿어도 되는 걸까요? 만약에 그것이 믿어진다면 이보다 기쁜소식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용서는 우리편에서 ‘하나님, 제가 좀 잘해보려고 했는데 또 죄를 지었네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런데 용서를 하나님편에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죄라도 용서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에게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이미 용서를 해주셨다면 그 증거로 세상에서 고생스럽게 살지 않고 좀 편하게 살게 해주시고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잘 풀리도록 도와주시면 용서를 받은 증거로 여길 것이 아닌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용서하심에만 집중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하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배경에는 이 세상자체가 잘못된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선악체제로서 완전히 굳어져 버렸습니다. 어떤 이는 선을 알아야 선을 행할 것이고 악을 알아야 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선을 행하면 자기가 잘나서 선을 행한 줄을 알고 악을 행하지 않으면 자기가 잘나서 알을 행하지 않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모든 행동은 욕망에서 출발합니다. 욕망에서 나오지 않는 행동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두 가지의 욕망이 있는데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올라오는 악한 욕망을 억누르면 다른 쪽으로 욕망이 집중이 됩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억누르면 욕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욕망으로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마치 풍선 한쪽을 누르면 바람이 다른 쪽으로 옮겨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죄를 짓고 난 후에 그 죄를 가리우기 위해서 무엇을 하는가 하면 나름대로 선을 행합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초등학생이 친구와 싸워서 코피를 흘리게 만들었습니다. 겁이 난 이 초등학생은 죄를 가리우려고 나름대로 선을 행하려고 하지요. 엄마가 시켜도 안하던 설걷이를 한다거나 거들떠보지도 않던 책을 보기도 합니다. 이런 선이라는 보자기로 악을 덮는 시늉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선과 악의 구별로 자기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욕망의 원인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죄를 자기의 선으로 덮거나 가리우는 습성이 있습니다. 선악과라는 독약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해독제가 없어요.
그래서 사람은 늘 행동을 할 때에 ‘이것이 옳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하고 스스로 자기를 점검을 함으로써 자기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선한 일을 했다고 믿는 사람은 그 선 때문에 만족을 할 것이고 악을 행했다고 의식이 되어진 사람은 악을 가리우기 위해서 나름대로 선을 행함으로 죄의식을 모면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세상 사람들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죄를 짓더라도 용서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사랑이 귀에 들려올까요? 선악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하나의 소품으로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싸움은 용서하심의 근거를 놓고 이 땅에서 한판 전쟁을 벌이시는 것입니다. 누구를 대상으로요? 선악체제에서 만족하고 자기의 의지로 욕망을 절제해서 자기가 선한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주님은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창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나름대로 선으로 악을 숨기려고 했던 것이 바로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든 행동이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선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죄를 선으로 가리운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용서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이 땅에 왔다는 예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만 천국에 가는 줄 믿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구원이지만 믿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선을 의지하는 사람은 심판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믿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