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네 종류의 밭(74)

박성산 목사 2017. 2. 6. 12:27

네 종류의 밭(마13:18-23)(74)

 

18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9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 요

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 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 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을 통해서 천국백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성경을 대할수록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이미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가 갈라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네 종류의 밭을 말씀하시면서 23절에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나오듯이 땅에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를 하는 사람, 깨닫는 사람을 말합니다. 과거에는 몰랐는데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아, 이제 알겠네요.’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백성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과거에 늘 궁금했던 것 중에 하나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는데 그 부활의 모습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시지 않고 제자들, 사도행전에는 500명으로 나옵니다만 이들에게만 나타나시고 믿지 않는 바리새인들이나 종교계의 지도자들에게는 나타나시지 않으신 이유가 참 궁금했었습니다. 그들에게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면 다 믿을텐데 왜 그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깨닫게 된 이유가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연구하고 지혜를 총동원하더라도 예수님이 속한 세계는 따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방법을 강구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나 예수님이 속한 묵시세계는 들어올 수 없고 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세계인 묵시세계를 본 제자들은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원하는 자에게만 부활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으로는 들어가지 못하는 그 세계를 부활의 영이신 성령께서 이미 구원된 자들만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증거가 바로 ‘깨달음’이고 로마서에서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믿음을 말씀하실 때에 자기의 의지나 잘남으로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전제하고 ‘믿음’을 말씀하십니다.

 

본문을 보시면 네 종류의 밭이 나오는데 밭은 사람의 심령을 말합니다. 19절에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라고 하는 사람이 나오지요. 21절에는 ‘넘어지는 자요’라고 되어 있고 22절에는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밭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밭이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밭은 스스로 무슨 일을 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스스로 개간을 한다든지 스스로 씨를 묻어 둔다든지 하는 힘이 전혀 없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밭을 예로 드신 것입니다. 또한 싫다고 해서 거부하거나 혹은 좋아서 받아들이거나 수정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습니다. 비가 내려야 물을 흡수할 수 있고 햇볕이 들어야 따스함과 빛을 받을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네 종류의 밭을 통해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려면 씨가 떨어져 봐야지 자신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맨 먼저 길가가 나옵니다. 19절에 보시면 말씀을 듣기는 들었는데 악한자가 와서 천국의 씨앗을 물고 가버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마귀가 천국의 씨앗이 얼마나 소중한지 우리보다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천국복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악한자가 천국복음을 낚아채기 때문에 듣기는 들었는데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감동이라든지 즐거움이나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악한 마귀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조리 빼앗아 가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길가와 같은 밭과 같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20-21절에 나오는데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아서 이제부터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어려움이나 환란이 닥칠 때에 복음으로 주어지는 기쁨이 환란의 고통에 의해서 심령이 말라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에게 원망하기 바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있어야 하냐’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를 떠나기도 하지요. 이러한 밭의 사람에게는 권면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면 밭이라는 것은 가뭄이나 장마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뿐더러 피하거나 이길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자기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환란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나 같은 못난 사람에게 은혜를 알게 해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인 줄 믿습니다.

 

세 번째는 22절에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나옵니다. ‘유혹’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이것은 예수님만 이길 수 있는 일이지 우리는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자체가 유혹이 아닐까요? 살아가면서 나에게 유용한 것이라면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가 필요한 것이라면 종교라는 유혹도 피할 수가 없지요.

 

이러한 사람들은 오늘 살았기 때문에 내일도 살아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나 신앙생활도 내가 살기 위해서 선택했다고 한다면 그 또한 유혹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더 큰 유혹이 있을 때 곧바로 뒤돌아서는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스스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 이 세 종류의 밭을 보시면서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길가는 길가대로 사는 것이고 돌밭은 돌밭대로 사는 것이며 가시떨기 밭은 가시밭대로 사는 것입니다. 생긴대로 그냥 사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밭이 남았습니다. 23절에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우리가 이 말씀에서 안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는 실패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성공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의 일이 반드시 성공한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의 마음에 믿어지신다면 어려움이 있더라도 하나님만 의지하면 될 것이고 염려되는 일이 있고 유혹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하나님의 성공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을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롬11:5-7에 보면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유심히 보시면 하나님은 우리가 은혜로 깨닫는 방향으로만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은혜가 순수하게 드러나는 방향으로만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은혜가 드러나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옥토요 그를 통해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몰론 그 열매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