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겨자씨가 작게 보이는 이유(76)

박성산 목사 2017. 2. 20. 04:34

겨자씨가 작게 보이는 이유

(마13:31-32)(76)

 

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 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또한 슬퍼하고 괴로운 일도 있지요. 그래서 그 사람이 현실을 어떻게 보는지 알려면 그 사람에게 어느 때가 가장 기쁜지 또는 어떤 것이 가장 슬픈가를 물어보면 됩니다.

 

그 때에 어떤 현실에 따라서 기쁘고 슬픔을 느끼는 것을 현실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해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것을 가지면 너무 기쁘겠습니다. 이것을 가지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저는 저것이 너무 괴로워요. 그러니까 저것을 멀리 하옵소서’

 

이처럼 자신의 현실과 자기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연결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고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다 신자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왜 볼까요? 그것은 실제로 천국에서 사셨던 분이 천국의 내용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이 바로 선지자요 마지막 때에는 예수님을 통해서 다 알려주셨는데 내가 바라고 있는 현실과 예수님을 통해서 전해진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천국과 이 세상을 보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보는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는데요.

 

여기에서 우리가 갈등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천국관을 그대로 내가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좋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할 수 있지만 내게 주어진 현실을 포기하면서 예수님이 바라시는 믿음이나 천국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은 할 수 없지요. 나의 현실을 무시한 채 예수님의 현실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담의 후손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아무리 믿음이 좋게 보이더라도 본인의 현실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그것을 ‘위기’라고 했습니다. 대책이 있는 위기라면 극복할 수 있는데 도무지 방법이 없는 위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현실을 만나게 하십니다. 믿음생활보다 현실을 더 중요하게 더 여기면서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강제로라도 믿음을 중심으로 살도록 하시면 더욱 좋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해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죄성을 마음껏 드러내게 해서 결국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청소년을 둔 엄마가 게임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아예 핸드폰을 빼앗아버리는 것을 차단이라도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냥 실컷 하도록 내버려둬서 나중에 별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하시는 방법으로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겨자씨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모습입니다. 아주 작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씀드려서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순탄한 길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겨자씨라는 것은 가장 작기 때문에 가치가 없게 보여서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습니다. 좀 전에 말씀 드렸습니다만 현실은 아주 크게 보지지만 믿음이나 천국은 시간이 있고 여유가 있을 때 찾는 것이 죄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선 나의 일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겨자씨를 천국에 비유할 만큼 실제로 아주 작고 보잘 것이 없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만큼 가치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겨자씨이지만 그 안에 지극히 큰 천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작은 씨안에 지극히 큰 나라가 있다는 것을 누가 이해를 할 수 있겠습니까?

 

엡1:18-20절에 보시면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소망이 얼마나 간절한지 또한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알게 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 눈에는 천국은 겨자씨만큼 작게 보인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천국이라는 현실이 죄 많은 아담의 자손들에게는 어떻게 비추일 수밖에 없는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천국이 이 땅에서는 어떻게 보여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작아서 미미하고 너무나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여지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천국이 아주 크게 보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해서 모든 일이 잘 풀리게 되면 천국이 아주 크게 보일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예수님 잘 믿고 예배를 잘 드리면 인생이 바뀌는 복을 받으면 천국이 크게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73:1-11에 보시면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하도다”

시편기자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뜻은 세상적으로 복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제대로 된 현실이 아니고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나에게 선한 분이시고 용서하신 분이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된 이 지혜와 이 마음보다 더 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 사람들의 현실관은 ‘나는 그리 죄를 많이 지은 적이 없는데 왜 나보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성공하고 행복하냐’는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도 모를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천국을 현실로 보는 사람은 ‘나는 비록 가난하고 하는 일이 잘 되지 않더라도 그 과정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더 알게 되니까 이것보다 큰 현실은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것이 가장 소중하십니까? 세상 사람에게는 천국이 지극히 작은 겨자씨로 보이겠지만 성도에게는 천국이 지극히 크게 보이는 소망으로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천국이 세상에 무엇보다 소중하고 크게 보여서 그 그늘아래 편안히 쉴 수 있는 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