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의 비유(79)
보물의 비유(마13:44)(79)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열쇠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있을 때에 이해가 되고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만 주어지고 열쇠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성령이라는 열쇠가 없어도 문자로 되어 있고 사람이 쓴 책이니까 얼마든지 연구하면 풀 수가 있을 것이다.’고 말입니다.
과학은 대단한 힘이 있습니다. 아무리 먼 나라라도 인터넷이 발달함에 따라서 그 나라의 정보나 뉴스를 얼마든지 알 수가 있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학의 특징은 인간에서 출발해서 무한대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의미는 인간의 차이를 두지 말자는 것입니다. 무한대로 가는 시간은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무한으로 가는 출발점에는 차별을 두지 말고 공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학이고 학문입니다.
만약에 출발하다가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중도에 포기한다면 능력부족인 것을 이해하지만 출발하는 시도조차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학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고 자격은 주어지는데 능력과 두뇌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학의 정신입니다.
어떤 목회자가 말하기를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하세요.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세요. 그러면 천국에서 상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성과급(보너스)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 증거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하면 평신도가 집사가 되어야 하고 또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면 안수 집사가 되어야 하고 장로가 되어야 하고 그 장로의 부인은 권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직분은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직분이 올라갈수록 복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바쳐서라도 직분을 얻으라는 말입니다.
그 말이 맞다면 십자가의 한 강도는 구원은 받았지만 천국에서 변두리에 초가집 한 칸 얻어서 부끄럽게 영원히 살아야 하는데 그곳이 정말 천국일까요? 아니면 감옥일까요?
왜 이러한 엉터리 같은 이야기가 나왔을까요? 원인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것은 인간편에서 똑같이 출발하더라도 그 성과에 따라서 천국에 가더라도 상을 받는 사람과 못 받는 사람이 판가를 난다는 의식에서 나온 주장입니다. 그 인식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예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떻게 출발하든지 하늘을 향하여 높이 날아서 독수리 날개 치듯이 날아올라도 결국 떨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3000명씩 혹은 5000명씩 물고기와 떡을 많은 사람들에게 먹였지만 그들이 떠난 이유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요14:6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함인데 그것은 우리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우리를 건져내서 끝까지 동행하므로 천국에 보내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 뜻을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도와주고 협력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출발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고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셔서 아버지께서 택하신 자를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방법으로 구원되는 것이 기독교의 진수입니다.
오늘 본문에 밭의 보화의 비유는 좀 전에 말씀드린 인간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을 적나라하게 들추는 비유입니다. 어떤 농부가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밭 자체는 별로 쓸모가 없는데 그 안에 감추인 보물을 가질 마음으로 주인에게 사겠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오해하면 농부를 자신으로 보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발견을 못했는데 자신은 예수님이라는 보물을 발견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충성한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과연 이러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 맞을까요? 보물을 발견한 이가 자신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또다시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으시면 안됩니다.
예수님이라는 보물을 알아보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추어진 보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에 생각했던 스스로 ‘깨달은 농부’와 그래서 ‘헌신한 농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물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제각기 보물이라는 것에 자신의 전체를 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보물이라고 하는 행복의 나라를 원합니다. 이것을 쾌락주의라고도 하는데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한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기도 하고 행복을 위해서 감각적으로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서 절제도 하고 양심껏 사는 것입니다. 행복을 위해서 남을 구제도 하고 행복을 위해서 예배도 드리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모든 행동에는 자기자신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마치 파랑새와 같다’고 했습니다. 멀리서 보니까 참 아름다운데 막상 손에 잡힌 파랑새는 냄새나고 볼품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새와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이지요. 하늘 높이 날아다니니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 뿐 자기가 그려놓은 망상에 스스로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린 내용은 성령을 받지 않아도 공부를 좀 하신 분들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을 좀 살아보신 분들은 동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안정되게 사는 것, 넉넉한 웃음 지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기껏 보물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이 정도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보시면 거의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물을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하늘의 보물을 가졌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자신의 행복함을 추구하는 노력에 불과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이러한 노력은 끊임없이 하는 것이 죄인들의 속성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가르쳐 주면 그때서야 내가 생각한 보물은 보물이 아니고 나의 행복을 위해서 교회에 다니거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전부 허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보물이 누구나 볼 수 없도록 ‘감추인 보화’라고 나오는데요. 엡3:9-11절을 보시면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여기에서 ‘예정하신’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공평하게 보신다는 말씀일까요? 아니지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어떤 계획과 생각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예정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아무도 알 수 없도록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밀은 성령이라는 열쇠가 아니면 어느 누구든지 알 수 없을 만큼 감추어져 있는 비밀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보니까 우리가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더라도 예정된 자는 반드시 구원된다는 것입니다. 신비롭지 않습니까?
우리는 생각하기를 능력껏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봉사를 많이 하면 천국에 가고 부족하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것이 더 우리에게는 공감하기 편한게 아닐까요? 그래서 부족하지 않게 무엇인가 자신의 정성으로 자꾸만 채우려고 하지요. 이것은 감추인 것이 아니라 드러난 것입니다. 즉,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드러난 것이지요.
그런데 감추인 것은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원될 자는 예수님이 반드시 그의 능력으로 구원하고야 마십니다. 예정된 구원될 자는 이 사실을 믿게 되어 있습니다. 예정되어 있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공평치 못하심에 불만을 가지고 거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하심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 예정하심을 이루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확실한 증거를 나타내시는데 벧전2:7절에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라고 나오는데 머릿돌은 교회의 기초가 되시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버린 돌로 취급을 받던 예수님이 버림받은 모습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면 내게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버린 돌을 미워하고 무시할 수밖에요. 그 현장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주여, 저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의 값으로 구원된 것이 바로 저입니다.’라는 고백이 십자가를 믿는 자들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나의 행복을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든가 하나님을 찾는 다든지 나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모두 죄라고 하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자들의 몫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농부되시는 예수님께서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감추인 보화(천국)를 들추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