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그물에 대한 비유(81)

박성산 목사 2017. 4. 2. 22:31

그물에 대한 비유(마13:47-50)(81)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 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오늘은 천국은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주님의 그물에 걸려 들 수밖에 없음을 보게 됩니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지 예수님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사람은 무조건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끝에 심판이 있을 때에 그 사람의 속성에 따라서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것이 천국의 특성입니다. 천국이 이 세상에 나타날 때는 반드시 심판하는 것으로만 나타납니다. 심판이 없는 천국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누구에게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기분좋은 말은 아니지요. 지금까지 모든 일을 나의 판단과 지혜로 살아왔는데 누구로부터 심판을 당한다는 것은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대한 결과와 심판의 자격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신을 의식하면서 생각하고 행동을 하게 되는데 만약에 잘못하게 되면 징계를 받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행동에 대한 절제를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러한 행동을 하면 주변사람들과 친구들이 비웃지 않겠는가? 하는 주위의 시선과 의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렇게 나름대로 양심을 기준삼아서 살아왔는데 심판이 왜 있어야 하는지에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은 옳은 일이라고 판단하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는데 막상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고 하신다면 우리로서는 참 난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옳고 그른일을 할 수 있도록 기준을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그 기준으로 반듯하게 살겠다는 것이지요. 만약에 그 기준대로 못 살면 기도할 테니까 그때 도와주시면 조금씩 고쳐가면서 살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자신을 볼 때에 겸손하고 신앙적인 모습인 것 같지만 사람의 마음이 항상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은 과거에 쫓기고 미래에 끌려가면서 강물에 흘러가는 돛단배처럼 계속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와같이 사람은 한 시간 전의 생각이 다르고 현재에 또 바뀌고 한 시간 후에 어떻게 바뀌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세월에 떠밀려 갈 뿐입니다.

 

고등학교 때나 대학생 시절에 꿈꾸던 것은 어디론가 다 사라져버리고 하루하루 살기에 급급하고 오늘 아쉬운 것만 나의 머리에 가득차 있습니다. 과거에 꿈꿔 왔던 것은 과거라는 강물에 다 흘러가 버리고 지금 내가 걱정하는 것에 얽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살 거야’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며칠 지나면 또 다른 강물의 현실이 나를 덮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믿을만한 구석이 없는 것이지요. 늘 다가오는 환경에 적응하기 바쁩니다.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가 양심적으로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양심도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스스로 심판한다면 핑계밖에 없고 자기 정당화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심판하시는 이는 예수님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판할 수 있는 자격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8장에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 앞에서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은 사람에게 우리가 돌을 던질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너희는 의를 내세울 만한 위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이 되고 안 되고는 오직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그 누가 예수님의 일에 관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의해서 택함을 받은 사람을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그물을 던진 분에 의해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구분됩니다. 고기들은 모릅니다. 자신을 판가름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물을 던진 분의 기준에 의해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갈라지는 것이지 고기 자체의 기준에 의해서 갈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물을 던지는 분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의’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있는 고기는 천국에 가지만 ‘의’가 없는 고기는 지옥에 갑니다. 그런데 이 ‘의’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만 나옵니다. 롬3:25-26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에게만 의가 나오고 그 외에는 의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구원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우리로서는 도저히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성령을 받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스스로 예수님의 의를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심판주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가르듯이 구원될 자와 버릴 자는 예수님만이 구분하신다는 것이 믿어지시면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복음 앞에서 ‘성화해야 구원받는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기준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성화의 기준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