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이냐 복음이냐(87)
전통이냐 복음이냐(마15:1-6)(87)
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 와 가로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 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 씀을 폐하는도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들 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부모님이 환갑이 되시면 자식들이 잔치를 해드렸는데 지금은 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아담시대에는 900년 이상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데요. 어느 90세 드신 노인께서 젊은이들에게 인생을 논한 것을 만약에 아담이 보았다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네가 인생을 알아?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인생을 논하고 있구만...’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100년이든 900년을 살든 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이 없이는 오십보 백보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거창한 것을 가지고 있어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생을 얻은 사람이 정말 복을 받은 사람인 줄 믿습니다.
마16:26절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도 온 천하의 일부라도 얻지 못해서 안달을 하고 있지만 설사 얻는다고 하더라도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가 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가 하면 사람은 결국 스스로는 아무런 의미없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또한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때 우선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무에서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놓치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미 있는 것에서 더 많게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만 있는 것에서 더 많게 해봤자 200년을 산다고 한들 그 사람이 죽으면 가지고 있는 것도 함께 날아가 버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셔서 있는 것 즉, 원래는 우리에게 없었는데 하나님과 관계맺은 관련성 때문에 하나님편에서 주어진 그 무엇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나에게 있는 것을 더 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주님, 100년 미만의 생을 살면서 나에게 있는 것을 아무리 많게 해봤자 아무런 의미 없음을 압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그것을 저에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그것만을 자랑하게 하시옵소서’라고 하는 기도를 해야 할 줄 압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여러분이 깨달아야 할 것은 다수가 가지고 있는 힘이라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세상에 없는 것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있는 무리들입니다.
본문 2절에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사람들이 모여 살면 반드시 규칙을 정하게 됩니다. 그 규칙은 사람이 행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정합니다. ‘유전’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관행, 관례’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람들이 지킬 수 있는 규칙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관행이 되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당신의 제자들은 왜 관행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지듯이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도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들의 관례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아주 두껍게 감싸고 있습니다. 조금도 틈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가 다수가 인정하고 있는 관례라고 하는 힘을 이길 수 있을까요?
지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관례라고 하는 높다란 벽에 예수님마저 항복하고 머리를 숙이라고 강력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전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말입니다.
눅12:31-32에 보시면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천국을 원하는 무리는 다수가 아니라 아주 적은 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은 무리가 천국을 원하면서도 세상의 다수의 힘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예수님도 아십니다. 그래서 ‘무서워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천국을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다른 것을 다 포기하실수 있습니까? 세상의 다수의 힘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습니까?
세상의 다수는 모든 힘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누군가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목숨이 빼앗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다수가 만든 관례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하고 거부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가 바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얼마나 가졌나? 로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리는 숫자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안에 있느냐 아니냐만 관심이 있는데 교회가 수원에서 몇 개가 세워졌는지 교인이 몇 명인지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비록 적은 무리지만 그 나라와 그 의를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위하여 오신 줄로 믿습니다.
사실 본문에 관례를 장로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진리를 행하는 방법이라고 만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음식을 먹을 때에 꼭 손을 씻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계명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도 섬겨야 되겠고 부모님도 섬겨야 되겠는데 힘드니까 장로들이 정하기를 물질로 하나님을 섬기면 보모님에게도 함께 섬긴 것으로 하자는 관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관례를 지킨 것으로 피할 수가 있느냐고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옳고 그름을 원하시지만 사람의 행위로서는 옳은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19:16-19에 보시면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이 청년은 사람의 한계를 모르고 있습니다. 계명을 다 지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시는 말씀이 ‘네가 가진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예수님께로 가지 못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자기 소유로 인하여 근심했다는 말은 이때껏 계명을 지킨 것보다 자기의 소유가 더 소중했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러면 계명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물질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질이 넉넉하면 마음도 넉넉하니까요. 그러니까 사람이 스스로는 예수님께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을 우리가 지키지 못한다면 누가 계명을 지킬 수가 있을까요? 롬13:8-10에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도바울이 수많은 계명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절대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함은 모두 자기위주이기 때문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떠한 노력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십니다. 다른 말로 계명을 다 이루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랑이 어떠한 사랑일까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나온 예수님의 사랑인데 이 사랑은 자기의 생명을 우리에게 아무 댓가없이 전가해 주시는 사랑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얻은 사람은 ‘내가 구원을 얻은 것은 나의 행위, 관례를 지킴으로서가 아니고 주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라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성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세상은 다수의 힘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으려면 그 지배하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도 관심이 없고 인정해 주지 않지만 소수의 무리는 십자가의 사랑안에 머물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나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버리면서 산다는 의미입니다. 남들이 볼 때에는 불행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는 하나님이 동행하심을 체험하면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갈 줄로 믿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끊임없이 퍼붓는 소나기 같은 사랑만으로 감사하면서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