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사람의 계명(88)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사람의 계명
(마15:6-11)(88)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 씀을 폐하는도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사람이 만든 유전(관례)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좀 더 편리하게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말씀의 본질을 흐리는 악한 것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은 좀 더 나아가서 사람이 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가 없고 오히려 방해를 하는가에 대하여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법을 만드시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법을 만들었다면 우리가 지킬수 있는 것들만 만들었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 해서 그 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한들 지킬 수 있는 법이 아닙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나서 법을 만드셨는데 선악을 아는 지식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선악의 지식을 가지면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만약에 선악의 지식을 아는 날에는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결국에는 아담이 그 법을 어겼습니다.
사실 지금의 우리는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그 인간이 아닙니다. 변질 되었지요. 죽음이후에 심판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냥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이 포함되어 있는 반면에 지금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삭제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기가 법을 만들어서 하나님이 아닌 스스로 보호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매개체의 하나로 종교를 만든 것입니다. 그 종교안에서 법을 만들어서 지킴으로 스스로 보호막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교와 법이 하나님의 법을 가리우고 있고 훼손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보시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였다는 말씀은 다른 말로 하나님과 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만든 법과 전통일지라도 사람이 만든 법과 전통은 결국에는 하나님과 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법과 전통을 만드는 또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병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위선’이라는 병인데요. 그것은 선악을 알기 때문입니다. 선만 알고 악은 모른다거나 악은 아는데 선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을 다 아는 것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이 악한 것만 알면 위선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 선으로 악을 포장할 수 있기 때문에 위선이라는 병을 가지고 태어난다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찾았을 때에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에 부끄러움(수치)를 알았습니다. 원래 인간은 부끄럽지 않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그 몸이 부끄러운 몸으로 변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그 수치심을 나뭇잎으로 가립니다. 그 나뭇잎이 오늘날에는 물질로서 사회나 이웃에게 기부하거나 도와주는 일의 만족감으로 수치스러움을 감춥니다. 물질이 선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일평생을 오지에서 헌신하며 봉사함으로 자기의 수치스러움을 가리우기도 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이라고 인식된 능력으로 가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본인에게는 선으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선과 악으로 판가름을 합니다. 자식이 서울대가면 선이지만 대학교도 못가면 악으로 인식이 되어있습니다. 물질이 많으면 선이지만 가난은 악으로 보기도 하지요. 미남이나 미녀도 선으로 보지만 그렇지 않으면 앋으로 봅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서 된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후손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본능으로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선을 알면 안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은 선을 행하면 반드시 그 댓가를 바라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선을 알고 행하면 자기 능력으로 선을 행하였기 때문에 복 받을 자격이 있고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누가 빠졌을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반대로 악을 행했을 때는 벌을 받기 두려워서 무엇으로 자신을 포장하는가 하면 선으로 포장을 합니다. 역시 예수님이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을 알면 안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 예배출석이 선으로 인식되는 순간 역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위선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래의 자기의 모습이 따로 있고 남에게 보여주는 포장된 가짜모습 즉, 본인 스스로 만든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포장의 재료가 본문에 나오는 유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다가오실 때에 부끄러워서 감추인 죄를 들추는 방식으로 다가 오십니다.
본문 7-8절에 보시면 사29:13절을 인용하신 말씀이 나오는데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사야29장의 내용은 하나님이 우상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는 대목인데요. 한마디로 우상을 누가? 왜 만들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다른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든 우상으로 자기들의 수치를 가리는 가리우개로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자기들의 능력으로 계명은 지킬만큼 지켰다고 자부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전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에게 본문 11절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말씀은 더러운 것을 먹었기 때문에 너희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원래 더러운 모습이 바로 너희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것, 나도 어쩔 수 없는 원래의 나의 모습은 더러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전부 다 더러운 것들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계명이나 관행이 아무리 거창하게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 전부 더러운 것들입니다.
지금껏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모든 행위가 결국은 나를 위한 가리개라면 우리가 그 본질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과연 우리가 선과 악을 모르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불가능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막2:17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러분이 가리운 그 무엇이 벗겨지시면 예수님이 벗겨내시는 것이란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물질이나 자존심이나 고집이나 자아가 무너지거나 벗겨지는 것은 나뭇잎을 걷어내시고 예수님의 가죽옷을 입히시려는 과정으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육신적으로는 고통과 아픔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죄인을 찾으시는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바로 죄인입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진흙탕에 빠져 있습니다. 저를 건져주시고 씻어주셔서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며 살게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의 유전이 아닌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