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93)
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마16:5-12)(93)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째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 하라 하신대
7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 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 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 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 을 기억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병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라는 병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태어나서 살다가 늙거나 병들어서 죽습니다. 이것은 죽음의 씨앗이 사람들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지요. 부자이든 가난하든, 건강하든,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든지 그는 환자입니다.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환자 말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여러분이 생명을 얻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모두 다 죽어가고 있는데 죽음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영원히 산다면 그 외에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하게 보이겠습니까?
사람들이 자기의 실상을 모르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자기는 죽음의 병이 걸린 환자이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얼마나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면서 피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 해결책도 없으면서 그저 자존심 상하지 않으려고 또는 남에게 기죽지 않으려고 사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자신이 누군지를 알고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이 자신에게 들어옴으로 엄청난 기쁨과 감사가 있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가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만 다만 사람들과 다른 점은 생명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있다는 것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환자로 살다가 죽음에 이르고 마는데 부활의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 성도에게만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은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서두에서 모든 사람이 죽음이라는 병이 있다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죽음을 본문에서 예수님이 ‘누룩’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누룩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점점 커져서 마치 암세포처럼 온 몸에 전이되어서 결국에는 죽게 만드는데 그 죽게 만드는 씨앗을 누룩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두 부류가 나오는데요. 한쪽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라는 누룩을 퍼트리려고 하는 무리와 예수님과 함께 하는 무리들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11절에서 ‘저 쪽 누룩이 너희들에게 퍼지지 못하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은 그들의 교훈 즉,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교훈을 말하고 있는데 이 누룩이 천국가는 성도에게 퍼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퍼뜨리려고 하는 교훈과 같은 누룩은 천국백성들에게는 허용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누룩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나쁘게 보인다거나 죄로 보이는 것이 아니고 아주 그럴듯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신의 죄를 감추는 방법으로 나름대로 누룩을 만드는데 그 요소가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서 의로운 것을 드러낼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성도에게 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주심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감사함이 아니라 자신들의 선과 정성을 다함으로 의를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누룩이라고 하시면서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롬10:2-3에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는 무시한 채 자기를 지키겠다고 자기가 만들어 낸 윤리와 도덕으로 자기의 의로움만 굳게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유대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온 힘을 다해서 거룩한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의 표어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요. 그러나 적어도 천국에 가는 무리들에게는 이런 방향은 도저히 용납이 안되고 물 한 방울도 스며들어서는 안되는 누룩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인 것입니다.
바로 이들을 깨부수기 위하여 예수님은 어부, 세리와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택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이스라엘에게 또 다른 율법을 주셨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자비하심과 안아주심과 베푸심으로 누룩없는 사람으로서 그들과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생각으로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인간이 만든 누룩을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는지요?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이 여러분을 죽이는 누룩인 것을 깨달으셔야 할 것입니다.
종교에는 카리스마가 있지요. 권위라고도 볼 수 있는데요. 그런데 예수님은 종교인이나 성직자와 같은 사람들의 권위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십니다. 그러면 그 속에 죄라는 것이 숨어 있는데 성직자들은 죄를 감추기 위해서 ‘신비감’을 조성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무엇인가 남다른 신비감을 보여줘서 자신의 죄를 감추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자기의 의’로서 사람들을 속이는 누룩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고전5:6-8에 보시면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유월절에는 양만 먹는 것이 아니라 누룩없는 떡도 함께 먹습니다. 그러니까 누룩없는 떡이 우리를 죽음에서 부활시킨다는 뜻인데요. 이 누룩없는 떡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희생이 누룩없는 떡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희생, 십자가에서 찢겨진 살과 피가 누룩없는 떡이 되어서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누룩없는 새로운 덩어리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에 대한 내용은 마5-7장에 보시면 자세히 나오고 있는데요.
그 중에 마5:28-30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말씀은 너희들이 아무리 윤리와 도덕으로 위장을 하더라도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간음하지 않은 척하더라도 마음으로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신의 죄를 권위로 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라는 누룩으로 벌거벗은 자신의 수치를 가리울수는 없는 것입니다.
천국은 그저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저 흘려주시는 피의 값을 그냥 주시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저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받은 사람은 감사와 안도감과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이 있을 때에 그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제자인 줄 믿습니다. 이러한 복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