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예수님을 따르려면(97)

박성산 목사 2017. 8. 7. 15:12

예수님을 따르려면(마16:24-25)(97)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 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 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 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우리는 지난주에 교회에 대해서 상고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을 하는 성도를 교회라고 부르는데 그는 본문말씀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된다는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24절에서 ‘따라 오려거든’이라는 말씀은 다른 말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즉, 교회인 성도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영생을 얻는 현실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보시는 현실과 우리가 매일같이 만들어내는 현실이 서로 차이가 있으니까 나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직장을 포기하거나 주어진 일을 멀리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지금 자기가 만들어 놓은 현실이라는 것이 제대로 된 현실이 아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청년들은 원하는 직장을 구하는 것이 어려운 현실에 살고 있고 사업하시는 분들은 저마다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누구나 할 것 없이 저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현실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짜 현실세계로 인도할 테니까 나를 따라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빈손으로 올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자기가 짊어지고 갈 십자가가 있다는 말씀인데요. 그것은 십자가를 모르면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고 결국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십자가를 빼면 오히려 주님을 따라가기가 쉬울 텐데 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실까요?

롬8:3절을 보시면 십자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이 말씀에서 마지막 부분에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에게 하나님은 육신을 입히시고 죄가 있음을 확정하시는 일하셨는데 그 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은 죄 덩어리인 채로 태어났고 죄 덩어리인 채로 죽어가고 있음을 세상에 알려준 사건이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라는 말씀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채 천국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본문25절에 보시면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자기를 위하여 천국에 가고자 한다면 잃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잃는 것과 같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교회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만 신자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거의 ‘나’를 보려고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에 잘 참석하는 나, 복음을 믿는 나, 칭찬받는 나, 관심을 받는 나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는 원래 없는 것입니다. 얼굴이 있고 손과 발이 있고 약 60조의 세포가 있지만 ‘자아’라는 없는 것입니다. 그냥 ‘나’라는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눈, 귀, 코, 손, 발과 오장육부는 있지만 자아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 몸을 이루고 있으니까 ‘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제 불행했던 ‘나’는 오늘 행복하면 어제의 ‘나’를 잊어버립니다. 그러면 어제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요? 이처럼 ‘나’라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인데 자신을 형상화시켜서 소중히 여기고 섬기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한마디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이지요.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는 않고 있는 것 같은데 결국은 원래 없었던 것이 바로 ‘자아’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데 진짜 자아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만들 수는 없고 예수님이 만들어 주실 때에 비로소 ‘자아’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자아’가 있는데 그 자아를 보고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풀리지 않는 고민거리가 있는데 원래 없는 자아를 내가 만들어서 내가 원하는 ‘나’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마귀가 욕심덩어리인 ‘나’로 만들어서 자꾸만 자신을 섬기라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움직여지더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데요.

요6:60과 66에 보면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 이상을 먹이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할 때에 저들이 떡을 먹은 이유로 왕을 삼고자 함을 아시고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의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을 하신 이후의 제자들과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자기가 스스로 살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왔지만 결국에는 거의 다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를 섬기고자 했던 증거입니다.

 

자기부인이라는 것은 ‘나’를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 덩어리인 것을 알고 ‘나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나를 새롭게 만들어 주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스스로 훌륭한 나, 가능성이 있는 나를 인정하는 것은 언젠가는 예수님을 부인할 수밖에 없음을 요한복음 6장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섬겼던 자아는 우리가 죽으면 함께 없어질 것입니다. 진짜 자아는 예수님이 자기의 마음을 우리에게 심어줘서 예수님의 공로가 스며들고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함이 스며들어서 새로운 자아가 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갈2:22절에 나오는 것처럼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는 놀랍고 신비스러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하는 성도는 비록 아담에 속한 흙이라서 몸은 후패하고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그의 속은 날마다 새로울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하실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말씀으로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면 되는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왜 지셨을까요?’ 그것은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듣고 십자가를 질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순종한다면 그 또한 또 다른 자아가 그런 노력을 할 뿐입니다. 신앙이 노력해서 될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직접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도맡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롬8:3절에서 ‘육신에 죄를 정하사’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성령이 오셔서 그 은혜를 주심으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서 자기부인을 하게 하시고 십자가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하시고 오직 주님밖에 의지할 이가 없음을 믿게 하셔서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따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러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심이 은혜인줄 믿습니다. 우리의 노력도 아니고 애씀도 아니라 오직 성령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셔서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이 나를 위하여 지심을 알게 하시고 이제껏 나를 위하여 살아온 삶이 무너지고 새롭게 만들어진 내가 더 이상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예수님을 좇아가는 진짜현실을 사는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