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게 쉬고 싶거든(105)
편하게 쉬고 싶거든(마18:8-10)(105)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우리는 때때로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힘겨운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를 긴장하게 만드시는 것 같습니다.
죄를 지으면 짓게 한 몸의 일부를 자르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기도도도 하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는데요. 그러데 그런 노력이 오히려 더 피곤하고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분명히 쉬게 해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스스로 더 많은 짐을 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육적인 안목과 영적인 안목이 나오고 있습니다.
만약에 자기를 육적인 안목에서 볼 때에 죄를 짓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면 매일 자기의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영적인 영역에 속해져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을 인정해야만 우리는 주님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너희들의 구원은 나에게 달려있다고 말씀하시면 되는데 굳이 본문 8-9절에 나오는 내용처럼 손이나 발, 눈까지도 죄를 짓게 하면 찍어버리거나 빼버리라는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난치병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것은 세상전체를 보지 못하고 너무나 작게 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식이 아프면 부모는 정성을 다해서 그 아이가 낫기 위하여 온 정성을 쏟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뭔가를 잘해서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어린아이처럼 여겨주셔서 품어주시고 안아주심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육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육밖에 몰라요. 그래서 영의 세계 즉, 품어주시는 세계를 모르니까 누가 대신해주고 보호해 주고 책임져준다는 의식이 없으니까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은 육밖에 모르지만 영은 육도 알고 영도 압니다. 육은 자기의 구원은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무엇이든지 나의 소유가 되어야 안심이 됩니다. 하나님도 나의 소유, 예수님도 나의 소유가 되어야 하고 무엇이든지 나의 소유된 것만 안심을 하는 것이 육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니까 본문8-9절에서 ‘나의 몸은 내 것이니까 내가 책임져야 해. 내가 거룩해야 되고 깨끗해야 된다’ 라고 생각하는 육적인 인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든 것을 자기 소유로 삼으려고 하고 영적인 사람은 소유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봉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육적인 사람은 자기가 잘난 것과 열심히 노력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지만 영적인 사람은 아무 노력한 것도 없음에도 구원해 주신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적인 사람이 자기에게 어려움이 오면 그 자체를 괴로워하고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얼마나 괴로우셨는지를 현실에서 참여케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고생을 통하여 나대신 고난을 당하신 주님의 아픔에 감동할 수 있는 기회로 여기는 것이지요.
그리고 육적인 사람은 이 세상에 정착하려고 애를 쓰지만 영적인 사람은 모든 짐을 벗고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 가고 싶어합니다.
육적인 사람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로 보인답니다.
마11:25-27에 보시면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 나타남과 숨기심의 그 차이를 유심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진 복음을 예수님의 은혜로 복음을 안겨준 그 사람을 예수님이 어린아이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도저히 알지 못하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감추신 복음을 은혜로서 보여주고 손에 쥐어주는 그 대상이 바로 어린아이라는 것입니다.
고전1:26-31에 보시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보시면서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릅니다. ‘목사님 그러면 우리가 노력할 필요가 없는 건가요? 신앙생활 잘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요?’ 저의 대답은 ‘네, 그렇습니다.’ 또 다시 질문을 ‘혹시라도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라고 하신다면 ‘그 동안에 수고하고 노력하고자 했던 욕심을 이제는 모두 버리고 어린아이로 사시면 됩니다. 그리고 감사함으로 채우면 됩니다.’
어린아이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내가 신앙을 위해서 애쓰고자하는 마음을 버리고 나 같은 미련하고 변변치 못한 인간에게 은혜를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 동안에 노력과 애씀의 수고를 이제는 모두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살겠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사시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면 될수록 세상 사람들을 볼 때에 어른스러운 자신을 볼 수 있을 텐데요.
사람들이 사소한 것으로 고민을 하거나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편히 쉬지 못하고 이리지리 동분서주하면서 좀 더 가지고 높아지려고 애쓰는 모습이 애처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어릴 때에 딱지나 구슬을 더 많이 가지려고 동네 친구들과 겨루기 했던 것을 지금 생각해보면 부질없는 욕심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른이 된 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가질수록 짐을 지면서 살게 됩니다. 가진 것을 지켜야 되기 때문에 더 가져야 안심이 되는 것이 세상의 원리인 것이지요.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로 살기보다 어린아이로 살면서 남에게 봉사하면서 주의 은혜로만 편한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