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사는 형제(107)
종말을 사는 형제(마18:15-20)(107)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 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 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 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 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 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 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 니라
오늘 말씀을 잘못 이해하시면 도덕적으로 이해하실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을 했는데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권고해서 말을 들으면 신자로 인정하지만 권고를 듣지 않으면 불신자로 여기라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곤란한 내용입니다.
누구라도 죄는 얼마든지 지을 수가 있는데 죄를 더 이상 짓지 않으면 신자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신자로 본다는 것은 본인이 죄인이 아니라 자기의 의로 천국에 가겠다는 바리새인들의 사고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본문을 이해하시려면 죄가 무엇인지를 아셔야 합니다.
20절에 ‘모인 곳’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그 곳에 예수님이 늘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곳이 어디일까요? 그것은 바로 교회라는 곳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건물이 아니라 또는 장로교나 감리교와 같은 교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신자들은 교회만 다니면 구원과 복을 받는 줄로 알고 있는 분들이 인기가 있고 소문난 교회를 찾아가는 수가 많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교회는 흔히 대한예수교 장로회 간판을 붙인 교회를 말함이 아니고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믿는 성도를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교회라는 것이 없어요. 마지막 때가 되었다는 증거로 드러내는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교회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교회가 있다? 그러면 마지막 때라고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정말 마지막 때가 되었다고 믿으시면 여러분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는 언제일까요? 1799년일까요? 1899년일까요? 1999년일까요? 그 시점이 있을 것 아닙니까? 마지막 때는 우리가 달력을 보고 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신 그 때를 마지막 때라고 합니다.
사실 모든 인류역사 가운데 제일 충격적인 일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일입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가 태어날 것과 죽는 날도 아시고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와 일할 때와 쉴 때를 아시고 무엇이든지 다 아시고 다 행하시는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신 적이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사건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2000년 전에 오셨다 가셨는데 또 오신답니다. 재림하신다는 것인데요. 그 때는 세상을 불태우고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가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집, 회사, 학교, 은행 등 모두 불태워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음을 믿는 사람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야 정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음을 믿는다면 우주의 주인이시고 천지만물을 만드신 그 분 앞에서 윤리와 도덕, 문화, 철학, 예술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특히 윤리와 도덕은 그 분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자는 인간들의 헛된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는 우리의 관점과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면 윤리와 도덕을 잘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똑같은 죄인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것은 지금이 종말인 것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서 판단이 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마지막 때에 죄라는 것은 의미없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가치가 없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라고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의 의미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마치 하루살이가 내일 죽을 지도 모르면서 내일 먹을 것을 준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 내일을 염려하면서 오늘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말고는 전부 다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을 ‘교회’라고 부릅니다. 다른 말로는 종말론적 공동체라고도 합니다. 종말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 15절에 보시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나오는데 정말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세상에서 인간의 모든 것은 의미가 없고 하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형제를 얻는 것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형제지간이 많으면 소중함을 모르잖아요.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에서처럼 전쟁터에서 자기 목숨을 걸고 서로의 목숨을 아껴주는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한데요. 핏줄이라곤 형제밖에 없기 때문에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을 바라보는 성도에게는 형제라는 것은 원래는 없지만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만난 형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형제를 얼마나 찾기가 어려운지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6:9-10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백성들에게 보내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이해를 시키고 납득을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절대로 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낸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사람들이 계명을 지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과 귀를 막고 마음을 둔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형제를 한명이라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모으는 분이 아니라 오고자 하는 사람들을 밀어내는 마당에 그 중에 선택을 받아서 은혜와 사랑을 입어서 ‘나는 주님이 다시 오심을 믿습니다. 나의 소망은 오직 주님의 재림입니다.’라고 서슴없이 외칠 수 있는 그 사람을 ‘형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제’를 만나기가 힘들지요. 너무 힘듭니다. 이런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형제를 만난다는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이 땅에는 모든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직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의지하며 다시 오실 날을 고대하면서 하루하루를 감사와 소망을 가지고 살기를 바란다는 권고를 받아들이면 형제로 인정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방인으로 여기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비록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 되지 않고 빚이 있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엄청난 기적을 받은 주님의 형제요 거룩한 성도라는 은혜를 너무도 감사히 여길 줄 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본문에서 말하는 교회요 형제인줄 믿습니다.
요즘의 신자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사람을 만나러 오는 것 같아요.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교제하는 재미로 오는 분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교회는 직업별로 모이더군요. 이미 친교단체로 전락해 버린 지가 오래된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본 교회가 진리가 없는 교회인줄 알면서도 그동안 사람들과의 정 때문에 그 교회를 떠나지 못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종말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은 특이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능해 보일지도 모르지요. 세상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종말론적 사고를 가졌기 때문에 내일 주님이 오실지도 모르는데 많이 가지거나 잃거나 그에 대해서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형제가 된 것을 감사히 여기시면서 오늘을 소망으로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