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용서하시는 하나님(108)
영원히 용서하시는 하나님
(마18:21-22)(108)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 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용서에 관한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면 되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하라는 도저히 불가능한 말씀을 하십니다.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는지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계를 맺을 때는 용서라는 통로로만 하십니다. 무엇을 주고 그에 대한 댓가를 받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 용서를 해주는 영역에서 만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용서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떨 때는 용서해 주시고 어떨 때는 용서가 어려운 것이 아닌 사랑하시는 자에 한해서 무조건 용서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시면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데요. 그 이유는 용서라는 통로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제물을 바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정성스러운 제물일지라도 받지 않으십니다. 오직 용서의 관계에서만 받으시는 것입니다. 가인은 이미 용서의 영역밖의 사람이기 때문에 제사를 받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에 에덴동산에서 마음껏 즐기고 누리라고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인간 원래의 모습입니다. 이와같이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면 한없이 넓고 깊은 바다보다 더 큰 용서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는 자기의 죄를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그런 죄를 지을 사람이 아닌데 죄를 지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어떠한 죄라도 지을 수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에 쫓겨났습니다. 그 후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자기의 힘으로 살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마음껏 즐기고 누리던 곳이 아닌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만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죄를 짓는다고 타락이 아니에요. 나의 힘으로 살아야 된다고 하는 모든 의식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게임을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빠르실 건데요. 바둑은 땅 따먹기입니다. 누가 한 점이라도 더 차지하면 이기는 것입니다. 장기는 상대의 왕을 없애면 이기는 것입니다. 축구는 시간 내에 한 점이라도 이기면 승리하는 것이지요. 야구도 9회까지 1점이라도 이기면 승리합니다.
이러한 게임들은 전부다 기술적인 것입니다. 힘과 기술을 겨루어서 이기면 승리와 함께 부와 명예가 주어집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나 용서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아무 상관이 없지요. 어떻게 하면 상대를 이길 수 있을까 고민이 가득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용서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타락한 세상에서는 기술자들만 필요합니다. 회사에서도 실적위주로 진급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는 우리에게 당신이 가진 기술은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취직할 때에 면접관들이 묻는 것은 신앙인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실력을 가졌는가를 묻습니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룰에 갇혀서 사는 것이 인간세상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뿌리는 인간 자체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용서의 뿌리는 언약입니다. ‘용서해 줄게’ 라는 약속, ‘어떠한 지경이라도 걱정하지 마’라고 하는 언약이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얼마나 내가 가진 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한 힘의 축적만이 나의 살 길이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학교에서 그 기술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목사님, 세상에서도 용서가 있지 않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세상에서의 용서는 자기가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용서해주는 아량과 힘을 가진 자가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용서하는 기준도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어릴 적에 구슬치기 하다가 동네 형들이 빼앗아가면 빼앗긴 꼬마는 용서하기 힘들지요.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구슬가지고 괜히 울고불고 했다고 쓴 웃음을 짓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같은 경험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시면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베드로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일곱 번까지 참는 것도 참 힘들지요. 그런데 1번부터 6번까지는 과거가 아닙니까? 지나간 것입니다. 7번까지 용서해 준다는 말은 6번째까지의 죄를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잖아요? 이건 용서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말로만 하는 용서는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언제나 영원까지 용서해 주신답니다. 그 말은 주님의 용서는 우리의 행동에 근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의 핵심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때에 그 근거가 우리가 어떠한 행동은 용서하지만 어떠한 행동은 용서하지 않는 기준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는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하셨는데 그 일에 우리가 포함된 것 뿐입니다. 이것은 용서받은 사람만 알게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베드로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요.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봉사와 충성을 다하고 있는데 이런 잘난 자신이 몇 번까지 용서할까요? 라는 자기를 과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에게 질문을 한 것입니다. 자신이 잘난 사람으로서 형제의 죄는 용서해 줄 수 있는데 일곱 번까지 하면 될까요? 라는 말입니다. 아직까지 베드로는 자신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용서해 줄 수 있는 자신으로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베드로와 같은 인물이 구약에 나오는데 요나 선지자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물이지만 진작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분명히 40일 후에는 망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요나가 삼일 만에 해야 할 일을 하루에 끝내고 언덕위에서 니느웨성이 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막상 니느웨 사람들이 한명도 죽지 않고 온 성 사람들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요나입장이 베드로와 같은 입장이고 니느웨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의 입장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많이 지은 것은 사실이잖습니까? 우리도 힘을 축적해야 살잖아요? 돈을 벌어야 살지요. 세상에서 다른 대안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나 입장에서는 다 죽어야 마땅합니다. 니느웨성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멸망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멸망당하지 않으니까 요나가 화가 나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일곱 번까지 용서라는 말은 자기 나름대로 최대한 아량을 베풀고자 한 말입니다. 우리는 3-4번까지 용서해도 많이 하는 겁니다. 연애할 때에야 상대가 무슨 실수를 하더라도 용서가 되는데 막상 결혼하면 조그만 실수라도 그냥 못 넘기는 수가 많지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와같은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마음이 상한 네가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방해자이고 그것 때문에 피해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요나가 자신만이 의롭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엡4:32-5:2에 보시면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이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베드로가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이 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누구를 용서해주고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에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흠 없는 제물을 받으시고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 편에서는 언약에 의해서 용서해 주는 것이고 우리 편에서는 그 언약을 믿는 그 관계로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비행기를 탔는데 테러범이 폭탄을 들고 있어서 5초 후에 터집니다. 그 때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제 조금 후에는 용서하심의 복으로 천국에 가 있음을 믿는다는 고백을 하실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용서해줄 수 있는 착한 일 하게 해달라고 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남과 비교해서 우월감에서 살게 됩니다. 남을 용서할 수 있다는 자기 우월감에 사는 베드로와 죄를 지은 사람은 단연히 멸망 받아야 마땅하다고 믿는 요나처럼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확인하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도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면서 살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