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결혼과 이혼(110)

박성산 목사 2017. 11. 14. 18:44

결혼과 이혼(마19:3-6)(110)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 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5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 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 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오늘 본문에는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어떤 사람이 이와같은 질문을 한다면 뭐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지금 예수님에게 시비를 거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니까 성경을 내밀면서 ‘사람이 자기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냐?’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연관을 시켜서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혼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시비를 거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바르게 살아야 되지 않느냐를 전제로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바르게 살 사람이 있느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질문을 하는 너희는 바르게 살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5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라는 말씀은 남자와 여자가 부모 곁을 떠나서 한 몸이 되는 이 원리에 순종하면서 사는 인간은 세상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시면 그들은 다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방금 전에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된다는 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라고 말씀 드렸는데요. 왜냐하면 우리는 남자 아니면 여자로 태어납니다. 남자인 나는 몸이에요. 그리고 여자는 몸 그 자체가 전부지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몸은 없잖아요?

 

그런데 남자는 결혼을 할 때에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결혼합니다. 때로는 가장이라는 이유 때문에 책임감도 안고 삽니다만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위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입니다. 여자도 역시 자기 의 행복을 위해서 결혼을 합니다. 이와같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결혼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필요에 의해서 결혼도 하고 필요에 의해서 이혼도 하는 것이라서 몸이 한 몸이 될 수 없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한 몸이라면 갈라서는 일이 없겠지요.

 

우리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 결혼했는데 10년이나 20년 정도 한 여자나 남자와 살다보니 별로 재미없고 거기다 싸우기라도 하면 헤어지고 싶은 때가 있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혼할 때에 여자가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핑계 삼아서 이혼증서를 주면 이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신24:1-4에 보시면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

 

바리새인들은 결혼관에 대해서 쉽게 말씀드리면 논리가 이렇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부부는 행복해야 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내가 끓여 준 된장찌개가 맛이 없다. 그래서 아내가 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지 못하기 때문에 죄스럽다. 때문에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죄를 하나님께서는 좋게 보시지 않는다. 따라서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헤어져야 된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허락한 귀한 가정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는가? 그럴 바에는 하나님을 위해서 헤어지는 것이 서로 유익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럴듯한 논리이지요?

 

그래서 아내가 간통하면 이혼하라는 계명을 유대인들이 점점 확대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집안 살림 못하면 이혼해도 되고 음식을 맛없게 하면 이혼해도 되고... 등등 이런 조항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앞세워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기에 바빴습니다.

 

방금 읽은 신명기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어떤 여자가 시집을 왔는데 ‘수치되는 일’이라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즉, 과거가 있던 여자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혼하려거든 이혼증서를 주고 이혼하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여자가 처녀라야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으로 이해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가정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혼을 해도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씀을 오해한 것입니다. 장차 천국의 백성이 된 하나님의 신부는 흠도 없고 티도 없이 완벽한 신부라는 말씀입니다. 그게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신랑은 흠이 없는데 신부가 흠이 있으면 자격이 안 되겠지요. 그래서 신부도 흠이 없어야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을 해서 자기 욕구를 채우는데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버리는 것을 당연시 여겼던 것을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사고를 가진 바리새인들이 이혼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결혼생활을 20년, 30년씩 하신 분들은 이 말씀을 들으시고 자부심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참아온 세월이 참 길었고 어려웠던 것을 누가 다 알겠습니까만 그렇다고 바리새인들보다 낫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오래 산 부부라고 할지라도 몸은 한 몸이 될 수가 없고 각자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때까지 살아온 것도 자기 편하라고 이때껏 참아왔지 상대를 위해서 살아온 세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한 몸으로 짝지어 주신 분이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에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고 하신 것은 이혼을 하든 안하든 상관없이 처녀이든 총각이든 관계없이 진짜 신랑이신 예수님과 결혼을 한 신부는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사실 불안합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자기 편하고자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사람이 나누일 수 있습니다만 예수님을 남편으로 삼은 신부는 신랑이 거룩한 분이시고 전능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 분이 신부인 우리의 손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가족을 사랑하는 자신을 믿지 마세요.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는 나, 희생하는 나, 가족을 보호해 주는 나 일지라도 언제 변할지 모릅니다. 변화무쌍한 것이 우리잖아요.

 

변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오직 예수님의 사랑밖에 없습니다. 끊임없는 용서의 피로서 죄를 가리워 주시는 그 은혜는 신부인 우리에게 영원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만이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신랑으로 모셔서 그 분 때문에 행복하고, 그 분 때문에 안심이 되고, 그 분 때문에 평안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