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된 자와 먼저 될 자(116)
나중된 자와 먼저 될 자
(마19:27-30)(116)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 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 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 가 많으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는 우리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좇은 만큼 댓가를 바라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집과 가족, 심지어 부모와 재산을 버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니까 이제 하나님이 주실 일만 남았는데 그것은 버린 것의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주시는 일말입니다. 사람이 행동을 할 때에는 무엇인가를 얻는다는 보장을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베드로도 예외는 아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전혀 기대하지 않은 것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원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부자가 되는 것, 내가 죽더라도 부활해서 천국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어떤 종교를 가지더라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종교라는 것이 세상의 부귀영화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좋은 곳에 가고자 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인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죽으심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의 터전위에서 살기 때문에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이 죽음을 유발하는 동기와 원인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열차가 죽음이라는 목적지로 가고 있는데 열차에 석탄이나 나무나 그 어떤 것을 싣더라도 상관없이 어차피 죽음이라는 목적지에 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는 백성은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 하나님을 죽게 만드는 원인제공자로서 느끼면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 나의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죽으셨구나.’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죽음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는 것은 사53:5절에 보시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셨는데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채찍을 예수님이 맞으셨는데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와 채찍을 예수님이 맞으시고 평화와 나음의 복을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눅22:31-34절에 보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이 세상은 닭이라도 예수님에 의해서 우는데 베드로가 구원받고 안 받고는 그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한다는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인데 이 말은 ‘밀을 골라낸다’는 말인데요. 마귀가 지옥에 데려갈 사람에 대하여 정확하게 공격하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라 할지라도 그 공격을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아니고서는 베드로는 스스로 마귀의 유혹을 이겨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구원얻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 덕분이지 우리의 결단에 의해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의 손에 달려있어요. 우리는 단지 죽음으로 가는 기차에 의해서 달려갈 뿐입니다. 그 기차안에서 어떤 노력을 해도 죽게 만드는 요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영생을 안겨다 주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방법입니다. 이게 믿어진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복음의 전부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섞이면 안됩니다.
자,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29절에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여러분이 이 말씀을 보시고 ‘버린 만큼 여러 배를 받고 영생까지 주신다고 했으니까 ’이제부터 버려야지’라고 생각하신다면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정통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가 주님께 바칠 것도 없을 뿐 아니라 아예 내 것이라는 자체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인줄 믿습니다. 집이나 땅이나 물질이나 부모나 자식까지 주님앞에 내놓을 자격도 안 되고 내어놓을 가치가 없는 것임을 아는 자만이 성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니까요.
지금 베드로는 자기의 것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것을 바칠 테니까 더 귀한 것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의 것을 바쳐도 그것으로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베드로의 것은 없으니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소중한 것을 바쳐서 댓가로 영생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대신 채찍맞고 피를 흘려서 준 영생을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0절에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내 것으로 바치겠다는 사람을 ‘먼저 된 자’이고 ‘내 것은 아예 없습니다.’라고 고백한 사람에게 주님이 영생을 거저 준 그 사람을 ‘나중 된 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영생을 받은 성도는 2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이 열 두 지파는 사람의 계획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12명의 자식을 야곱에게 준 것입니다.
사실 레아와 라헬이라는 자매가 한 남편인 야곱을 두고 서로 사랑받겠다고 시기와 질투에 의해서 생겨난 자식들이 12명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로 인한 열매로 태어난 자식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인간의 죄의 흔적인 12명의 자식들을 축복된 천국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불가능함을 가능함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 사람은 구약시대의 12지파가 받은 똑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지파가 받았던 은혜와 복을 받은 사람에 한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수가 계7:4절에서 십 사만 사천이라고 나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모든 것을 버림으로 예수님에게 내가 바라는 것을 달라고 기도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것은 처음부터 없음을 믿으시고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영생이 아무런 댓가없이 주어져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