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호산나라고 부르는 자(121)

박성산 목사 2018. 1. 30. 15:21

호산나라고 부르는 자

(마21:6-11)(121)

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 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 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 는 누구뇨 하거늘

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계획을 포기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계획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 앞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합니다.

 

흔히들 꿈과 비전을 가지는 것이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라서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나의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은 세상을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러한 욕망을 버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령을 받아도 이런 욕망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를 잘 믿으면 죄를 덜 짓고 욕심을 버릴 수 있다고 또는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을 하는데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얻는 것이지 자기의 본성이 바뀜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니까 인격이나 성격이 바뀐 것을 구원받은 증거로 삼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시간이 지나고 또 다시 죄를 짓는 계기가 되면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본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됩니다. 교회를 30년이 아니라 50년을 다녀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뀌지 않아도 괜찮아요. 사람이 변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하심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구원얻은 성도는 사람의 계획은 소용이 없고 하나님의 계획만 진행되어 가는 것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져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좀 어렵습니다. 해석이 힘든 이유가 나귀새끼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 앞에서 ‘호산나’를 외치면서 자기 겉옷을 벗어서 그 길에 펴는가 하면 종려 나뭇가지를 베어서 길에다 펴는 무리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지시에 의해서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왜 하필 겉옷과 종려 나뭇가지를 길에 펼쳐 놓았을까요?

우리가 이 장면을 보면서 알아야 할 것은 이 무리들은 어떤 사람의 지시에 의해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것은 어차피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하실 일이었지만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다 펴는 그 일을 하나님의 편에서 보시면 이해를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을 알아보고 환영하는 무리들 자체가 스스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된 일로써 동원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로 오셨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리기 위해서 그들을 동원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하는 궤도에서 창세전부터 지금까지 빗나가거나 어김이 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 계획에 의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즐거움을 가지고 순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계획으로만 사는 사람들은 늘 불안과 걱정으로 살수밖에 없어요. 부질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요?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나의 뜻과 계획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 종속되고 붙잡힌바 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획으로 종속된 무리들이 본문에서 ‘호산나’라고 외치고 있는데 시118:25-26에 보시면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호산나’라는 말은 환호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와~아’라고 하는 감탄사인데 그 내용은 ‘구약성경에서 오신다고 하는 그 분이 진짜 오셨네요.’ 와~아라고 환호할 때에 그 표현이 ‘호산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신다는 그 분은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실까요?

본문 9절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라는 말씀 중에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는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위에서 이미 확정된 것인데 그 뜻을 이 땅에서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 ‘호산나’라고 하면서 기쁨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요11장에 보시면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가 나옵니다. 이들은 평소에도 예수님을 극진히 모셨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나사로가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이들이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께 속히 오시라고 전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틀 후에나 출발하셨습니다. 물론 나사로가 죽은 후였습니다.

 

마르다는 오신 예수님에게 일찍 오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겠는데 왜 이제 오시느냐고 원망스러운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25-26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하나님의 가장 높은 곳에서 확정된 뜻을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단지 오빠가 죽지 않고 회복되기를 바랄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하시니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나사로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한 삶은 이 땅이 아니라 천국에서 사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은 자는 다시 살 것이요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가장 높은 곳에서 확정된 계획에 따라서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기쁨의 소리가 ‘호산나’라는 것입니다.

 

골3:1-4에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호산나’라고 외칠 수 있는 있는 사람은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가정에 있더라도 하늘엣 것을 생각하고 직장에 있더라도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엣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호산나입니다. ‘내가 이 땅에 살면서 하늘을 알 수 있구나.’라는 놀라움이 ‘호산나’라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고 하는 고백이 ‘호산나’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심령에 꽃이 피듯이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호산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도 죽지않고 살아있는 나사로가 있는 그 세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은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산자들끼리 모이는 세계를 사모하면서 참여하게 될 날만 우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앞당겨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내용이 본문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이미 확정된 하나님의 계획을 통하여 죽어도 다시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음을 믿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