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외식주의자들(133)

박성산 목사 2018. 4. 30. 16:17

외식주의자들(마23:1-7)(133)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 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에 습관적으로 나올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가 드러나야 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이 신령한 말씀을 통하여 적나라하게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스스로 알기는 어렵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통해야 자신이 어느 만큼 죄를 가지고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때로는 자신의 죄를 슬그머니 덮거나 못본척 지나쳐 버리는 수가 많지요.

 

그런데 우리 못지않게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본문에 나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받지만 예수님에게 지적을 받게 되는데요. 2절에 보시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님 앞에서 모세의 권위를 가지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앉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죄를 드러내고 있는지 우리가 제3자의 입장에서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있는 인간들이 어떤 모습인가? 그리고 예수님에게 호되게 질책당하고 꾸중을 듣는 이유를 본문을 통하여 알고 있어야 할 줄 압니다. 그래야 내 속에 있는 것이 그들과 함께 지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심판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나를 비난할 때에 겁먹지 마세요. 죄인이 죄인을 비난할 자격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는 이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예요. 이 사람들은 주로 하는 일이 우리가 볼 때에 최고의 경지에 거룩함을 이루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남들에게 존경을 마음껏 받아도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마5:20에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보더라도 그들이 거룩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예수님도 인정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유독 열심인 사람이 있었는데 바울이라는 사람입니다. 빌3장에 보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신을 밝힌 바 있지요.

그런데 그 바울이 사람들과 견줄 때는 그럴듯해 보였습니다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거룩한 빛 앞에서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들보다 훨씬 거룩하게 보였던 그 자체가 예수님 보시기에는 가장 큰 죄인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움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 왔었던 것입니다. 2절에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만 봐도 어느 만큼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만 출32장에 보시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시내산에 아래로 내려왔을 때에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레위인들을 통하여 3000명가량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만약에 모세가 계명을 들고 오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 계명으로 인하여 죽이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들은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한 계명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법을 지켜서 복을 받겠다고 하니까 예수님이 보실 때에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롬 7:2-4에 보시면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늘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과 함께 법이 주는 체제속에서 살아왔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쁜 짓을 하면 법의 기준에 의해서 죄인이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율법과 헤어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남편인 예수님과 살면 그제야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신부가 두 신랑과 살수는 없지요. 율법을 남편으로 삼든가 아니면 예수님을 남편으로 삼든가 둘 중에 선택해야 됩니다. 양 다리를 걸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신부라면 헤어졌다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법을 지켜야한다는 강박증이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삼아놓고 율법을 지키는 방식으로 사는 것은 정말 예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래도 신자로서 자존심 때문에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나?’라고 말입니다. ‘내가 성숙해진 증거로 이 정도의 법은 지켜야 체면이 설 거야’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아직도 자신의 잘남을 자랑하기 위한 자기집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법을 잘 지키는가에 대한 기대를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속에 선악의 의식이 있어서 조금만 노력하면 잘난 사람으로 될 수가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따먹었던 선악과 때문에 ‘나는 선을 행해야 하고 그래야만 거룩할 수 있어’라는 미련이 늘 있습니다. 그래서 법의 건너편으로 건너가고 싶어합니다. 법은 하나의 경계선이거든요. 사람은 법으로 인하여 자기가 잘남을 나타낼 수 있는 근거를 만들고 싶어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을 하루에 10장을 읽는 사람이 5장을 읽는 사람보다 우월감을 느끼고 싶지만 1장도 못 읽어서 기죽기 싫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라도 법을 만들어서 지켜야 하는 부담과 즐거움을 동시에 가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 보면 하나님의 법을 어김으로 오히려 주의 은혜를 깨들은 사람이 나오는데 바로 다윗이라는 사람입니다. 시51편에 보시면 다윗이 죄를 짓고 난 후에 나단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은 잠깐 실수를 해서 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죄 속에 집어넣어서 옛날 아담을 만나게 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지요. 지금까지는 법을 잘 지키는 자신이 진짜 모습인 줄 알았는데 시51:5절에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를 통하여 고백하게 됩니다. 아담이 자기 속에서 지금도 살아 있음을 안 것이지요. 옛날에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따먹었던 자가 바로 자기라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법을 지키며 자기를 절제하면서 ‘잘난 나’를 보면서 살아왔는데 죄를 지어보니까 ‘나’는 빈껍데기에 불과하고 진짜 ‘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아담이었음을 그제서야 알았던 것입니다.

 

이렇듯이 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의 잘남을 보고자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실까요? 5-7절에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경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놓은 것을 머리나 이마에 또는 어깨나 소매에다가 붙인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스스로 거룩한 모양을 갖추는 것을 그들은 당연시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임을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창녀나 새벽이슬을 비할 수 있는 공간이면 족할 줄 아는 걸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바리새인들보다 하늘나라가 가깝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천국은 생명나무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생명을 가진 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 분의 뜻대로 말입니다.

 

이와같은 진짜 복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