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세상의 끝을 알려주시는 예수님(144)②

박성산 목사 2018. 8. 6. 00:07

세상의 끝을 알려주시는 예수님

(마24:9-14)(144)②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 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 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 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여러분, 먼저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세상의 끝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 이러한 일을 우리가 막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막을 수 없지요. 왜냐하면 그 종말을 누가 이끄시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사람들은 세상이 종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는 것 같습니다만 막상 자신의 종말이나 환난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기 마련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그에 대한 예로써 롯의 아내를 들었습니다.

 

롯의 아내가 소돔과 고모라성이 심판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를 했다면 뒤를 돌아볼 이유가 없었겠지만 세상의 미련과 함께 하나님께서 자기가 살던 땅을 심판하시는 것에 대한 불만과 원망함으로 뒤를 돌아본 결과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만 하나님을 미워하거나 원망하고 우리는 롯의 아내와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극한 상황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불만과 원망은 고스란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원래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 롬1:28에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이와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본질을 드러내십니다. 딤후3:1-5을 보시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말씀은 우리의 본질을 보라는 말씀인데요. 이 말씀 앞에서 하나님께 내세울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신 분이 계시나요? 솔직히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지킨다고 하더라도 내일도 지킨다는 보장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한명도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본질을 드러내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육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우리의 육을 거룩하게 바꿔서 계명을 지키고 또한 지킬 수 있는 육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셔서 육을 죽이심과 동시에 육을 품어서 구원하십니다.

 

요6:63에 보시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이 말씀은 육은 구원에 있어서 아무런 보탬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육은 인간의 본성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요. 그래서 구원은 성령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성숙된 육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모든 공로를 우리가 아니라 주님이 가지셔야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계명을 주시고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육으로서는 지킬 수가 없고 육의 한계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성도는 육은 육에 불과하다는 것 즉, 육으로는 말씀을 지킬 수가 없을뿐더러 구원에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두려움이나 부담이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만약에 자기의 공로가 조금이라도 구원에 영향을 끼쳤다면 그는 근심과 걱정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공로의 기준이 애매모호하고 혹시 자신의 죄로 인하여 사라질지도 모르고 공로가 유지되기 위해서 또 다른 공로를 세워야 한다는 부담과 불안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불안함은 아무리 계명을 잘 지켰다고 하더라도 없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은 육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피값으로 얻어진 구원임을 알기 때문에 성도의 모든 삶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고 주님의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전적으로 아멘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의 사람으로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들을 가리켜 성경에서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본문에 나오는 미움 받는 것, 미혹을 받는 것, 사랑이 식어지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이 있을까요?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이렇게 일을 하시겠다는데 근심하거나 걱정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의 끝을 하나님이 기어이 이끌고 가시겠다는데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하시는 일에 아멘으로 따라갈 뿐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는 것인데 본문 14절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세상에 육을 가진 사람들은 종말과 심판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움과 함께 불만을 가지며 살아가지만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영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통하여 천국복음이 더욱 널리 퍼지기만을 소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끝을 계획해 놓으신 모든 일에 박수치면서 따라가는 그 삶이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시작과 끝을 조금도 차질없이 운행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을 사는 성도입니다. 세상의 끝이 언제 오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육의 사람인지 아니면 영의 사람인지 하나님께 원망하며 사는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전적으로 ‘아멘’으로 사는 사람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세상의 끝이 오더라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