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슬기로운 처녀(151)

박성산 목사 2018. 9. 25. 12:46

슬기로운 처녀(마25:1-13)(151)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쌔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 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 라 하니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 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오늘도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처세술이나 교회를 더 크게 짓는 방법이나 교인을 어떻게 하면 많이 모으는지 혹은 예배를 잘 드리는 방법을 말씀하시지 않고 예수님은 오직 천국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천국은 우리의 상식과 조금 동떨어진 느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무리 천국이 이런 곳이라고 설명하셔도 우리가 평소에 상상하고 있던 천국과는 낯설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알려주시는 천국과 우리가 바라고 있는 천국이 서로 맞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천국에 가고 싶어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이 있고 자기를 사랑하는 욕심이 있는 이상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바라는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가 아니라 나를 위한 나의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이지 결코 우리의 나라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내가 꼭 들어가야 할 나의 천국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의 가르침을 받으면 천국은 나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임을 믿는 사람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결혼을 하게 된 ‘신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열 처녀가 나오는데 그 중에 진짜와 가짜 신부를 구분하기 위해서 신랑을 기다리게 하는데 누가 더 오래 기다리나?가 아니라 어떻게 기다리는가에서 판가름이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난주에 설교를 통해서 악한 종과 착한 종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텐데요. 악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오실 것이라고 보고 술친구들과 먹고 마시며 주인이 제발 늦게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진 자가 악한 종이고 착한 종은 밥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아침이나 저녁이나 주인이 빨리 오시기만을 고대하며 주어진 일에 충실한 종으로 자기의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다 주인의 소유임을 아는 자를 착한 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착한 종을 예수님과 결혼하는 신부로 비유하신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섯 처녀만 있으면 될 텐데 어차피 천국에 못 들어가는 다섯 처녀가 왜 등장해야 하는가하는 의문이 드실 텐데요.

 

세상에는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기준입니다. 마 13장에 보시면 세상에 가라지가 있고 알곡도 있다고 나오는데 알곡의 가치를 알려면 가라지가 있어야 하고 착한 종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면 악한 종을 보면 알 수가 있고 슬기있는 처녀를 알려면 반드시 미련한 다섯 처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0명의 신부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슬기로운 처녀는 미련하게 보이고 오히려 미련한 처녀는 지혜롭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련한 처녀는 세상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천국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주인인 나라, 내가 영원히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세상 말입니다.

 

그런 욕심에서 나온 것이 종교가 아닙니까? 죽어서 좋은 곳에 가고자 해서 만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그런 마음에서 만든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는 미련한 처녀가 지혜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처녀는 자신은 아랑곳없고 오직 신랑에게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신랑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와 영원히 살 세상은 자신의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의 세상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둘 다 똑같이 신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결혼식을 낮에는 너무 덥기 때문에 밤에 합니다. 그런데 신랑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신랑은 오고 싶을 때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는 등을 준비해서 신랑을 기다리는데요.

 

등을 준비하는 것은 신랑이 왔을 때에 본인이 어디 있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불빛이 없으면 신부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으니까 신부는 자신을 알려주기 위해서 등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보시면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라고 나오는데 신랑이 너무 늦게 오니까 열 처녀가 모두 잠이 들었습니다. 마 24:22에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얼마나 신랑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면 날을 감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신부의 입장에서는 잠시라도 잠을 잘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처녀는 등만 준비하였는데 슬기있는 신부는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미련한 신부와의 차이인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했느냐? 아니냐? 에 따라서 신랑과 결혼을 하느냐? 못 하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름이 무엇일까요? 주님의 약속, 주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기름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는 육을 입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육에 얽매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주님의 약속으로 능력을 입은 사람은 졸면서도 신랑이 온다는 소리에 자신이 등불이 되어서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으로 신랑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랑이 언제 올지 그 날과 그 시는 알지 못해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신부이지만 때로는 졸기도 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마시더라도 신랑은 신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신랑이신 주님과 신부인 우리를 만나게 해줄 불빛으로 밝혀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