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을 기다리는 양(153)
심판을 기다리는 양(마25:31-34)(153)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 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 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 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오늘 말씀은 심판에 대한 내용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있다는 것은 기분이 나쁜 일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할 만큼 유쾌한 일은 아니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민족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독안에 든 쥐와 같다는 것입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하나님이 만드신 틀에 가두어져 있다는 것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하기 싫어서 아예 교회를 다니지 않거나 예수님을 외면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복을 준다고 해도 신앙생활을 할까? 고민해야 할 판국에 심판이 있다는 것은 부담스럽고 불편한 소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이 꼭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눅 16장에 보시면 부자와 나사로의 삶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었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면서 매일 행복하게 살았지만 나사로는 자기 몸의 헌데를 개가 핥을 만큼 괴롭고 비참한 삶을 살다가 부자도 죽고 나사로도 죽은 이후에 진정한 복이 과연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기준이 바로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부자는 자기가 매일 호화로이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은 복을 받아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나사로가 거지로 사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부자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입니다.
잘살고 성공하는 것이 복인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망하는 것이 복인 줄은 상상하지도 못할 일입니다. 무조건 성공해야 복이라고 믿어 왔으니까요. 그래서 진짜 복과 가짜 복이 무엇인가를 하나님이 심판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진짜 복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어야 복 인줄로만 알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참된 복은 세상에서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을 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요5:24에 보시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에서 ‘믿는 자는’이라는 말씀을 보면서 자기가 믿으면 되는 줄로 아는 수가 많은데요. 신념을 가지고 자기최면을 걸듯이 믿으려고 애쓰는 것을 성경에서는 ‘행위’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믿는다고 하는 것을 자기의 의지로 믿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행위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성령께서 주신 자만 가질 수 있는데 이 믿음을 가진 성도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서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는 오늘 본문에서 심판하시러 오신다는 예수님이 부담되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생명을 얻었는데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까요?
오히려 빨리 오시기만을 고대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심판과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본문 32-33절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나오는데 왜 양은 구원을 얻고 염소는 구원에서 제외가 되는가 하면 목자가 필요한 것은 양이고 염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입장에서는 양 이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양은 주인만을 기다립니다. 이 고해와 같은 세상을 지나서 하루빨리 주인을 만나기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인생의 주인이기를 바라면서 주인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의 주인이 되는 것을 너무 부담스러워합니다. 왜냐하면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양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안도감을 가져다 줍니다.
걱정이나 불안이나 고민하는 그 모든 것이 목자의 울타리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목자의 품안에 있으면 되는 거예요. 양의 삶은 목자의 것입니다. 양은 주인이신 목자의 인도하심에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목자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이 나의 사정과 고민을 아실까? 라는 것이지요. 히 4:15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목자되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실제로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환경에서 사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인생에서 겪어야 될 경험들을 친히 다 체험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인도하지 않으면 양이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다 아십니다.
우리가 일이 좀 잘되면 얼마나 교만하고 잘난 체를 하는지, 반대로 일이 좀 안 풀리면 얼마나 깊은 수렁에 빠져서 낙심하는지를 다 아십니다. 목자되시는 예수님은 그곳에 오셔서 건져주시면서 자기의 양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체휼’이에요. ‘불쌍히 여겨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살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마움과 기쁨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복이야말로 참된 복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그 복의 실체가 언제 드러날까요? 바로 심판날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짜 양이시라면 목자되시는 예수님이 어서 오셔서 누가 양인지 누가 염소인지를 구분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양인가? 아니면 염소인가? 입니다. 이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염소가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양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염소로 바뀔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양일까요? 그것은 심판주는 오직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이 양인 반면에 심판을 받고 안 받고는 내가 하기 나름이라고 믿으면서 착하고 바르게 살면 된다고 믿는 사람은 염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착하게 사는 것이 기준이 아니라 오직 용서하시고 체휼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임한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양이신가요? 그러면 목자가 계심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목자의 울타리에 갇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복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목자가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시는 순한 양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기자의 복된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시 23:1-6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