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양이 흩어지는 이유(160)

박성산 목사 2018. 12. 9. 22:14

양이 흩어지는 이유(마26:31-35)(160)

31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 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 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 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성경에는 우리가 스스로 천국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 7: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생명으로 가는 길은 좁은 문, 좁은 길로 가야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것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좁은 길로 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은 좁은 길로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길에 서 있느냐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에 따라서 천국인지 지옥인지가 아니라 ‘내가 지금 어떤 길에 서 있는가’에 따라서 판가름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넓은 길과 좁은 길을 선택해서 가면 되는 것일까요?

 

구원은 자기도 모르게 좁은 길로 가게 된 사람만 얻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가게 된 사람들의 특징은 은혜로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세월이 가면 갈수록 크고 깊게 느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방금 말씀드린 좁은 길을 자진해서 가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저부터도 싫어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힘든 일은 기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괴로운 일은 피하지요. 그리고 대세가 기우는 쪽으로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즉, 넓은 길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넓다는 것은 많이 간다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진리라고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붙잡아 주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넓은 길로 가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본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좁은 길로 간다면 목자되신 분이 강권하여 나를 천국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없이 우리 스스로 천국에 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목자를 붙들고 욕심을 채워달라고 하기 바쁘지요. 넓은 길로 좀 데려다 달라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고, 부자되고 싶고, 존경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그런 우리를 목자의 뜻으로만 데려가기만 합니다. 우리의 원망과 불만을 들으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양은 그러한 목자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31절에 보시면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고 기록되었는데 양이 흩어진 이유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양은 목자를 알아보고 그의 음성에 길들여져 왔는데 갑자기 목자가 사라지니까 양이 어쩔 줄을 모르고 흩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이 나빠서가 아니라 목자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목자를 치시는 분은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창 3:15절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기록되었는데 이 세상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싸우는데 어떤 목자라는 분이 오셔서 하나님의 허락에 의해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거든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 약속한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는 아무런 이유없이 죽임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그 분이 바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목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자를 치면 즉, 죽이면 그의 양들은 흩어지게 되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양이 흩어져보니까 목자 없이는 양들의 능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자식이 부모님의 품속에 있을 때는 따뜻함과 포근함을 느끼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때서야 부모님 품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웠던가를 알게 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만만하게 예수님께 말합니다. 본문 33절에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는 아직 자기가 양 인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제 갈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양이 목자를 찾아가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양인 제자들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교회에서 전도를 몇 명하고 충성을 얼마나 많이 했나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모든 현실은 녹아서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일들은 십자가를 의지하라고 벌어진 일들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갈 3:1절에 보시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데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너희들이 참으로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선한 일을 많이 해야 천국 간다고 믿기 때문에 목자가 바로 자신인 것입니다.

 

 여러분, 심판대 앞에서는 양의 목자가 누구인지에 따라서 천국인지 지옥인지가 갈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목자가 누구인지요? 예수님이십니까? 아니면 본인 스스로 목자이십니까? 계 4:10-11절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양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