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함께 기도할 수 없는 이유(161)①
예수님과 함께 기도할 수 없는 이유
(마26:36-42)(161)①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 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 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 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 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 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 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내용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남겨 두고 그 중에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들을 따로 데리시고 올라가서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때껏 기도를 많이 하셨지만 오늘은 특별한 기도를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소원성취용이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을 못 채워서 스트레스를 푸는 용도가 아니고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을 훤히 꿰뚫어 보는 사람에 한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나에게 덮쳐오기를 간절하게 소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뜻이 주기도문의 내용처럼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부족한 저에게 그대로 덮쳐서 저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성취되고 구현되기를 바람에서 드리는 소원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세상적인 욕심과 탐욕은 사라져야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오롯이 하나님의 뜻만 나를 통해 이루어진다면 그만큼 만족할 일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시면 지금까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서 기도했는지 모르겠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에 함께 동참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36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들의 한계입니다.
그 이유가 예수님이 보시는 세상과 우리들이 보는 세상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시작과 끝을 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기도하지요. 욕심이 채워지기만을 바라면서 말입니다.
만약에 내일 결혼을 앞두고 있는 신랑과 신부가 있는데 그 부모님이 기도하기를 ‘내일 날씨를 맑게 해주시고 축하객들이 많이 오게 해주시고 예비부부가 행복하게 잘 살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기도하기를 ‘내일 오기 전에 오늘밤이라도 예수님이 오시면 그보다 기쁜 일이 없겠습니다.’라고 기도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태어난 곳이 이 땅이기 때문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믿는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저 세상에서 행복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의 기도에 절대로 동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백성들의 기도를 듣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 1:11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죄인은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예배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기 바쁘지요.
그리고 자기과시를 하기 바쁩니다. 마 26:33절에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35절에도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고 자기를 내세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도 모르는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이러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만든 모든 종교는 두려움을 해소해 보려는 몸부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두려움이라는 것이 사라질까요?
백만장자가 되어도 그 불안한 마음은 고스란히 남아있고 서울대학을 나와도 마찬가지이고 대기업에 입사해도, 재벌총수가 되었더라도, 자식이 효도를 아무리 잘해도, 부부가 아무리 금실이 좋더라도, 명품 옷에 금장식으로 몸을 꾸며도 두려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죄인들의 속성을 아시는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겟세마네에서 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는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기도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을까요?
다음 주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