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예수님의 죽으심(173)

박성산 목사 2019. 4. 14. 22:29

예수님의 죽으심(마27:50-54)(173)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 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 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 들이었도다 하더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장면입니다. 이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죽음입니다. 만약에 제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면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며 하늘이 어두워질까요? 절대 그럴 일이 없지요.

왜냐하면 저의 죽음은 거룩한 죽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낱 죄인이 죽는데 자연이 반응을 할 리가 만무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는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위들이 터졌습니다.

 

우리는 죄 값으로 죽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같은 죽음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노아의 방주에는 8명만 구원받았고 나머지는 모조리 물이 빠져 죽었습니다. 그 죽은 사람들이 바보가 아닙니다. 좀비같이 아무 생각없이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노아를 바보취급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방주를 바닷가에서 짓는 것이 아니라 산에서 짓고 있으니까요.

 

오늘날에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똑똑한 사람들은 차고 넘치는데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관심조차 없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십자가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인데 자기 백성이 하나님에 의해서 죽고 다시 사는 자만이 영생을 누린다는 것이 십자가가 가진 뜻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나중에 죽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그런 얘기는 듣기 싫어합니다. 그저 오래 살기, 행복하게 살기, 건강하게 살기에만 관심이 있지요. 그래서 교회에서는 그러한 주제로 설교를 하거나 세미나를 여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해서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기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난을 이 땅에서 우리가 고스란히 참여하게 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성도라면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것은 성도도 역시 죽이는 방향으로 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먼저 죽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시는 것은 말씀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에 한해서 말씀으로 다시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이신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노아를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에 누가 관심을 가졌을까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방주를 만들 때에 몸이 힘든 것보다 아마도 외로움과 고독함이 그를 많이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가족 외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죽음같은 삶으로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마치 죽은 자처럼 취급하는 것 말입니다. 만약에 노아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거나 인정받았더라면 방주를 끝까지 지을 수가 있었을까요? 결국 노아와 그의 가족은 사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방법입니다.

 

그런데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대로 해석해서 자기는 죽지 않으면서 구원받는 방식을 선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전세우기, 엘리야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본문 49절에 보시면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기록되어 있는데 그 당시에 유대 백성들이 엘리야를 기다리는 것은 마지막 때에 엘리야가 오시면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구원을 얻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예언이 말라기 4장 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오해해서 하나님은 자기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성전을 짓게 하고 메시야를 보내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유대 백성들은 이 땅에서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가는 천국을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도는 하나님께서 살리시기 전에 반드시 죽이는 과정을 거치는 자들에 한해서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지 않고 갈 수 있는 천국은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본문 51절에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라고 나오는데 성소의 휘장은 거룩한 곳과 세상을 구분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휘장 안쪽에는 거룩한 곳이고 바깥쪽은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히 9-10장에 보시면 그동안에 닫혀있던 생명의 길이 휘장이 찢어짐으로 이제는 생명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이 설명하기를 천국의 거룩한 빛이 휘장으로 인하여 가려져 있다가 휘장이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빛이 어두운 세상에 비추게 될 때에 자고 있던 자기 백성들을 그 빛으로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엡 5:14절에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런데 사람들이 천국의 휘장을 열기 위해서 아무리 법을 잘 지키고 헌신적인 봉사를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이 빛으로 깨우는 자만이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 반드시 대가를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선하게 산만큼 복을 기대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사는 유대 백성들이 성전을 짓고 엘리야를 기다리는 것과 똑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이미 성취된 줄 믿습니다.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땅이 진동하고 바위들이 터지고 심지어 무덤에서 잠자고 있던 성도들까지 모조리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도의 죽음은 죽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한 몸으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복락을 누리는 삶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에서 함께 죽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일이 주의 은혜로 가득찰 것입니다. 이런 일도 감사할 일이고 저런 일도 기뻐할 일인 줄 믿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 6:4-10절에서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러한 복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