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

버가모 교회(12)

박성산 목사 2020. 1. 26. 19:17

버가모 교회(계2:12-13)(12)

 

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죄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 네가 어디에 사는 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 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 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오늘은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버가모라는 도시는 ‘신들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신전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많은 신전이 있었다고 하니까 얼마나 많은 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이 가득했던 버가모에 있는 주의 종을 안다고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에 보시면 ‘내가 아노니’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아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것이 맞지요.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인들 모르시겠습니까만 이름까지 아시는데 본문에 ‘안디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디바를 아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참 부러운 일이지요. 왜냐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나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만사형통하게 하실 것이라는 기대감과 위험에 처해있을 때에도 언제든지 구해주실 것이라는 여유로운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아시고 늘 동행할 것이니까요.

 

그런데 안디바가 그만 순교를 당했습니다. 목숨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안디바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순교를 당하지 않도록 피할 길을 주시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안디바를 죽음에 이르도록 가만히 계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창 4장에 보시면 최초로 등장하는 신앙인이 최초로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된 성도는 이 땅에서 편하게 살라고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뜻을 펼치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안디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사탄의 정체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으셨습니다. 악한 영인 사탄이 이 땅에서 은밀하게 사람들을 주관하고 있고 농락하고 있음을 밝히는데 안디바를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안디바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성도는 죽임을 당한다는 억울함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감격과 감동 때문에 오히려 감사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순교라고 해서 ‘죽음’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성도가 하는 모든 일이 순교라는 범위안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나 같은 죄인이 은혜를 입었구나’를 아는 성도는 주님의 사랑이외에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 감각이 무뎌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기쁜 일이 있어도 너무 기뻐하지 않습니다. 슬퍼도 너무 슬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들이 크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덤덤하다고 해야 하나요? 그래서 그 모든 일을 순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는 그 증거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찾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사랑받은 증거를 세상에서 성공, 행복에서 찾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자칫 오해하기 쉬운 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러한 복은 주실 거야’ 혹은 ‘이 정도의 문제는 해결해 주실 거야’라고 손에 잡히는 증거를 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술책임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그 분은 자신의 뜻을 믿음을 가진 우리를 도구로 삼아서 자신의 뜻을 펼치시는 일 외에는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성도에 대한 사랑입니다.

롬 8: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과 세 친구가 나옵니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바벨론이라는 이방나라에 포로로 잡혀와서 고급관료에까지 오르는 직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다니엘서의 내용이 그렇게 끝난다면 성경에 기록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세 친구를 통하여 거룩하신 뜻이 담겼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이 되었겠지요.

 

어느 날 느부갓네살 왕이 금 신상을 만들어서 누구든지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질 것이라고 법으로 제정을 했습니다. 당연히 세 친구는 절을 하지 않아서 풀무불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놀라서 급히 일어나게 되었습니다(단3:24). 세 친구 외에 다른 한 사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자세히 담겨있는 것은 단순히 흥미를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 12:1-3절에 보시면 티끌 가운데에서 부활을 해서 영생을 얻을 자가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다니엘과 세 친구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교회로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그들의 삶과 죽음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살후 2:9-10절에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탄에게 속한 자들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할 것이지만 주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가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 있을 때에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확인할 수 있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 적신이 있을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등을 돌린다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본문 12절에서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으로 나옵니다. 안디바가 주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다는 이유로 인하여 악한 영인 사탄에 의해서 죽음을 당합니다. 그 죽음을 당하게 한 사탄을 심판하기 위하여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나오는 것입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은 여러분,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붙잡고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