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

어린양에게 있도다(35)

박성산 목사 2020. 8. 10. 00:37

어린양에게 있도다(계7:9-12)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 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 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 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 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 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오늘은 인침을 받은 자들이 천사들과 함께 오직 어린양이 되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장면입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천사들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예수님을 통하여 하신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어린양이 없는 하나님이 있다면 가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어렴풋한 개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을 통한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을뿐더러 관심조차 없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만 아는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도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갈 2: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자기를 위하여 만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이해를 할 수 있을까요? 해석을 한다고 하더라도 엉뚱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나도 함께 죄인으로 죽은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성도는 항상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이 죽었다는 것만큼 편한 것이 없지요. 산 사람에게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죽은 자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있더라도 짐이 아니지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자기가 죽은 자라는 것을 알았으면 사는 것을 내가 산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는 내 것, 나의 영역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할 수 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살 수밖에 없지요. 내 것이 있으면 불편합니다.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 있으면 남의 것과 반드시 비교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 많이 가져서 남에게 뒤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경쟁의식으로 살게 되고 결국에는 그것이 자기의 의로 자리를 잡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살아있는 것 같지만 죽었고 실제로는 그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십니다. 우리 안에서 주님 뜻대로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그냥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지요.

 

그러니까 나의 뜻을 계획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만 이것이 얼마나 우리를 편하게 하는 일인지 몰라요.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자임을 알고 무엇을 하더라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라는 말입니다.

 

빌 1:20-24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사도바울은 자신만을 생각할 때에는 하루 빨리 천국에 가는 것이 유익한 일이지만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수고스러운 육체이지만 너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빌립보 신자들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도 역시 자신은 이미 죽었고 그 속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의 뜻만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죽은 자로서 내 것이 없으니까요.

 

이러한 성도에게 교회의 부흥이나 자식이 성공하는 것이나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별 의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죽은 자가 무슨 재미를 느끼겠습니까? 죽은 자가 어찌 내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러한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산 자들이 천국에서 이러한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이러한 복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요 3:6절에서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적인 사람이 영의 일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성령으로 거듭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만이 수십억 재산이 있는 것보다 ‘내 것이 없다’는 것이 진짜 축복인 것을 압니다. 이 진리를 믿으시면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도 하나님 앞에 빨리 데려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서글플 때가 많지요. 그러나 이 화서동에서 복음을 외치게 하시는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바울처럼 제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하신다면 하나님의 뜻에 따를 것입니다.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