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46)②

박성산 목사 2021. 1. 31. 23:29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계11:1-3)

 

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2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 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성전에서 경배하는 자들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혹시 본문 속의 단어를 잘못 보면 경배하는 자들이 측량하는 것으로 보는 수가 있으니까 유의하셔야 합니다. 이들이 측량도구로서 이 세상에 살면서 이방인들에게 존경은 커녕 오히려 핍박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늘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복을 받는다거나 잘 믿을수록 하나님이 형통하게 해주신다는 말씀을 전하면 저도 참 신이 나서 전하겠는데 설교 때마다 십자가, 피, 은혜, 고난을 증거하니까 어떤 때는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세상에는 희망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곳에서 예수님이 은혜를 주셔서 천국백성으로 삼으신 것 보다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려고 합니다.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고난을 받는 기간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 본문 3절에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는 말씀에서 일천이백육십일을 년으로 계산하면 3년 반입니다.

 

그런데 3년 반을 다른 말로 ‘한 때 두 때 반 때’로 나누입니다. 그 이유는 한 때에 벌어질 일과 두 때에 벌어질 일과 반 때 동안의 일이 모두 고난과 관련이 있지만 각각 그 기간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다니엘서에 나와 있습니다.

단 9:25-27절에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무너뜨리려니와 그의 마지막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하게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이 말씀은 70이레에 대한 말씀인데 내용을 이해하시려면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아닥사스다왕까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나중에 기회되면 자세히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가 성도라고 하지만 육적인 것에 얽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늘 죄를 짓고 살지요. 사도 바울도 죄밖에 없는 세상에서 가진 것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고까지 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한 때 두 때 반 때의 경로를 따라서 육적인 것들을 토해내게 만드십니다. 사람은 고난이 없으면 자기 잘난 맛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성도에게 고난을 주시지요. 그 고난을 받게 되는 과정이 첫 번째로 한 때입니다.

 

이 한 때는 자기의 죄를 아는 기간입니다. 어떤 죄를 지었고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알기 때문에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기간이 한 때라는 기간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한 대가로 다른 나라로부터 침범을 당해서 나라를 빼앗기는 서러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바벨론, 메대파사, 헬라, 로마까지 식민지 생활을 했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한 때가 지나면 하나님이 ‘수고했고 애썼다.’고 위로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두 때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도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안 이상 하나님이 어떤 고난을 주시더라도 웬만한 고난은 겸손한 마음으로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두 때는 자신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당하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제일 억울할 때가 언제인가요? 요즘 회사에서 50대 초반 되시는 분들이 조기은퇴당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구동성으로 그들은 억울하다는 말을 하더군요. 평생을 회사를 키우기 위해서 열심히 충성했는데 나이가 들었다고 회사에서 쫓겨나오게 생겼으니 얼마나 배신감이 들겠습니까? 어떻게 가족을 책임질지 막막하기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모르는 것이 있는데 바로 두 때입니다. 이 기간 역시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요셉의 예를 들 수가 있습니다. 요셉이 바로 그런 고난을 당했는데요. 아버지에게 사랑받는다는 것과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형제들에게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는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꿈도 꾸고 싶어서 꾼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감옥살이까지 해야 했습니다.

 

이만큼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참기 힘든 일이지요. 이 기간을 두 때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반 때가 남았는데 한 때 두 때를 지나는 동안에 고난을 당한 성도는 자신의 삶이 희망이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지고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

 

한 때 두 때의 기간을 지나는 동안에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하나님이 살아계시기는 한 건가?’하고 의심이 들 정도로 마구 짓밟히는 처참함, 나의 사정이나 힘든 일을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계획만 관심이 있는 것을 경험하면서 마지막 남은 반 때는 이 고백을 하게 됩니다.

 

빌 1:19-20절에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고전 15:10절에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러한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한 때와 두 때를 지나고 본문 2절에 나오듯이 천국백성만 이방인에게 밟히고 무시당하는 고난을 당할 때 그 자체가 주님의 증인으로의 삶을 사는 것이고 측량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고난을 당하시거든 내가 주님의 증인이 된 측량기구가 되었음에 기뻐하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나 같은 죄인이 지옥에 가도 아무 할 말이 없는데 이방인들이 가득찬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과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을 증거하시는 도구가 된 증거가 바로 고난이니까 말입니다.

 

마 25:32-41절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이 말씀에서 천국에 들어갈 백성은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기억이 없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겸손한 척 한 말일까요?

 

그것은 천국백성은 주님이 하시는 일과 가시는 길에 그저 뒤따라가기만 했을 뿐 자기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음을 알고 진정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마치 뱃사공이 가고 싶은 곳으로 노를 저으면 배는 따라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와같이 고난도 역시 우리가 인내하고 참았기 때문에 통과했습니까? 천만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고난을 미리 감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능히 이방인들의 고난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인 줄 믿습니다. 그러니까 고난을 내가 통과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고난은 차고 넘칩니다. 천국 백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따라서 순종하는 측량도구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