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

두 증인이 하는 일(47)①

박성산 목사 2021. 2. 14. 23:37

두 증인이 하는 일(계11:4-9)

 

4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 즉

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 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 에 못 박히신 곳이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보는 사람에게만 해석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내용이니까요. 롬 1장에는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관심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먹고 사나? 무엇을 해야 더 벌수 있나?’에 대해서만 온통 집중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나 교회는 돈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수십 년 교회에 다녔더라도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목사들이나 하는 일이고 신자들은 그냥 대충 알아들으면 되지 않나?’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에 여러분이 성경해석을 못하시거나 잘못보시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엉뚱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하는데요.

 

하나님의 뜻이 다 성경에 담겨져 있는데 그 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성령께서 감동을 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원어를 안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구요. 수천 번을 읽는다고 자동으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저와 여러분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을 때만큼은 시간이 정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나의 생각이나 고정관념을 모두 날려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나의 시간이 정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정지되었다는 말은 뜻이 완성 되었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그 뜻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누구의 뜻일까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창세전에 말입니다. 하나님이 시간을 만드신 분이지 시간 속에 갇힌 분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처럼 마음과 생각이 수시로 바뀌거나 어떤 일로 계획이 변경되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황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도 뜻이 바뀌거나 상황에 따라 계획이 변한다면 진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구원은 항상 불안해서 하나님에게 매일 인정받으려고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잠자리에 들 때에는 ‘혹시 오늘 밤 저의 영혼을 데려가신다면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시면 미신을 믿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이미 확정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받아들이시면 되는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다 자기의 뜻을 포함시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거나 들으실 때는 나의 생각과 계획들이 모두 지워져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것들을 챙기겠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용납이 되기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벧후 3:8절에 보시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요?

 

이것을 문자 그대로 보시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천년이 하루이면 500년은 12시간입니까? 이렇게 보시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단선적인 시간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과거, 현재, 미래를 차례대로 보는 개념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이 지나면 과거가 되어버리고 오늘이 지나면 미래가 올 것임을 우리가 다 아는 것인데 이것을 단선적인 시간관, 역사관이라고 합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시간에 갇혀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엇을 하는가 하면 선택과 결정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오늘이나 내일이나 혹은 일년의 계획을 세우고 나름대로 진행해 나가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나온 것들이 각 사람들의 기억 창고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고 과거가 되면서 현재를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은 나를 위해서 열심히 살지요.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각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과거에 벌어진 일이니까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됩니다. 멀고도 먼 과거에 일어난 일이니까요.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2000년 전에 일어난 과거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때 그 사건이 나를 위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믿는 것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믿지 못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묵시세계에서의 시간은 세상에서 흐르고 있는 시간과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믿음이라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에게만 특별히 주시는 선물이 아니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인데요.

 

방금 읽었던 벧후 3:8-9절을 다시 보시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세상에서 흘러가고 있는 시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약속이라는 시간은 따로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묵시의 세계라고 합니다. 묵시는 역사를 인정하지 않아요.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묵시의 세계(천국)가 이 세상의 구원받을 백성에게 임할 때에 현재라는 시간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마 17:1-4절에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이 말씀은 묵시와 역사가 만나는 장면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과거의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B.C 약 1400년~1500년 전의 인물이고 엘리야는 B.C 약 900년 전의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시간을 초월하여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1000년이든 2000년이든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만 통용이 되는 역사입니다. 천국에서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방금 읽은 말씀에서 예수님 앞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있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 앞에 있다는 것은 묵시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역사에 갇혀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입니다.

 

제자들이 꿈을 꾸거나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보고 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와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두 증인인데요. 이들은 세상에 살면서 묵시세계를 만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증거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천국이 세상에 임한 것을 다른 말로 본문 3절에서 ‘권세’라고 합니다.

 

이 권세로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 할 증인으로 선택을 당한 것입니다. 묵시세계에 살던 모세와 엘리야가 세상에서 예수님을 만났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증인으로 세우실 때에도 역시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 권세를 받은 사람이고 그 권세의 인도하심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증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