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

두 증인이 하는 일(47)②

박성산 목사 2021. 2. 22. 01:39

두 증인이 하는 일(계11:4-9)

 

4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 즉

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 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 에 못 박히신 곳이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두 증인에 대한 배경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세상의 시간은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흘러가면서 늘 변하는데 하나님의 뜻은 완성되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변하지 않고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임하게 될 때에 세상의 시간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은 영적인 시간과 세상의 시간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증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권세를 주님에게로부터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에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권세를 받은 사람은 그 권세가 인도하는 대로 순종하는 발걸음을 걷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묵시, 천국의 능력으로 역사의 시간과는 아무 상관없이 증인으로 삼으실 때에 역시 우리도 주님의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고 그 권세 아래에서 증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상상하지도 못할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정에서나 학교에서 배운 것 밖에 모릅니다. 이들이 옛날에 죽었던 모세와 엘리야가 살아서 예수님과 함께 얘기 나누는 것과 예수님이 말씀으로 바다의 파도를 잔잔케 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죽은 지 사흘 된 나사로를 살려내셨다는 것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저들은 세상을 현실로 보지만 우리가 세상을 볼 때에는 가상세계로 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들 모두다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실제의 세계는 베드로가 보았던 요한과 야고보와 더불어 제자들이 보았던 그 세계가 실제의 세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증인도 실제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에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권세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요 17:2-3절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연구를 아무리 많이 하고 성경을 수천 번을 읽는다고 할지라도 천국의 권세를 받지 않으면 예수님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 1:12-13절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와같이 하나님께로 난 자들을 권세를 받은 자라고 합니다. 이들을 다른 말로 거룩한 자, 성도라고 합니다.

 

이들이 본문 4절에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합니다. 롬 11장에 두 감람나무가 나오는데 참감람나무와 접붙임을 해야 하는 돌감람나무가 있는데 이들 외에는 구원받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증인들이 해야 할 일들이 서로가 다릅니다. 하나는 엘리야와 같은 증인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모세와 같은 증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본문 6절에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라고 나오는데 이 내용은 왕상 17-18장을 보시면 엘리야 시대에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던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풍요로움에만 관심이 있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진짜 생명은 하늘에서 비가 온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가뭄을 주신 것입니다. 엘리야를 통해서 말입니다.

 

이와같이 주의 증인은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의 권세를 받아서 말씀만이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음료인 것을 온 땅에 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증인이 할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증인 가운데 모세가 나오는데 본문 6절에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이 말씀은 출 7장의 예를 든 것입니다.

출 7:17-19절에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리니 애굽 사람들이 그 강 물 마시기를 싫어하리라 하라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령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강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내밀라 하라 그것들이 피가 되리니 애굽 온 땅과 나무 그릇과 돌 그릇 안에 모두 피가 있으리라’

모세가 하나님의 권능을 받아서 강을 피로 물들게 하는 장면인데요. 애굽 사람들이 생명의 원천인 강물을 먹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인 가나안 땅은 믿음을 가진 백성만이 참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런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세상의 물은 참 생명을 주지 못함을 하나님은 알려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끝까지 깨닫지를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을 때에 백성들이 한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곡식을 심는다거나 씨를 뿌려서 열매를 먹었다는 기록은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아무런 한 일이 없는 백성들에게 준 이유는 생명은 하늘에서 그저 주시는 은혜로 얻는 것이지 무엇을 심은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백성들에게 노동을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에 아무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약속의 땅은 노동을 하거나 열심을 다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외치는 자들이 오늘날의 증인, 엘리야와 모세인 줄 믿습니다. 오직 복음을 외치는 것이 가뭄에 비를 내리는 것이고 예수님의 은혜만을 전하는 것이 강을 피로 물들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증인라고 해서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엘리야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모세는요? 이들은 우리와 다른 점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틈만 있으면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데 급급하지 천국을 소망하는 것은 아주 먼 훗날로 미루기에 바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방해하시고 내 뜻을 모조리 빼앗아 가시는 쪽으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런 일들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두기보다 세상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리고 어느 만큼 자기밖에 모르는 더러운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흐름에 떠내려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사니까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없이 해야 할 일들이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문득 문득 죄밖에 모르는 죄인인 나를 용서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나오고 세상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들의 삶입니다.

 

이런 복을 받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