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강해

수고의 보상(7)

박성산 목사 2022. 11. 21. 14:06

수고의 보상(2:9-11)

 

9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 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 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 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11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 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 익한 것이로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솔로몬이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즐길 것은 다 해보니까 기쁘더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후에 느낀 것은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다 헛되고 아무 유익이 없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솔로몬 자신은 마음껏 즐길 것은 다 해놓고 우리에게 그리 살지 말라는 것인가? 하는 섭섭한 마음이 드는데요.

 

이 대목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즐거움과 기쁨은 시간이 지나면 후회와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한 계시록을 2년 넘게 여러분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지요. 계시록이라고 해서 미래에 있을 사건이라고만 보지 마시라고 말씀드린 기억이 있는데 미래에 있을 사건이지만 미래를 앞당겨서 현재에 살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무슨 말인가 하면 시간의 개념을 바로 아실 필요가 있는데요. 세상 사람들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과거가 있어야 현재가 있고 현재가 있어야 미래가 있듯이 과거가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고 현재가 없는 미래는 없다는 뜻입니다.

 

이 사고로 성경을 보면 창세기는 옛날에 있었던 사건과 인물들의 이야기로밖에 이해할 수밖에 없고 계시록은 앞으로 있을 사건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계시록이 현재와 연결이 안 되니까 읽기가 부담스러울 수밖에요.

 

반면에 성도가 바라보는 시간은 카이로스입니다. 예를 들면 치즈를 슬라이스로 잘라 한 조각씩 먹는 것처럼 성도에게는 오늘 하루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담겨져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를 읽는 성도는 과거에 있었던 일이지만 현재에 벌어지고 있는 인물과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고 계시록을 읽어도 미래가 아닌 오늘 벌어지고 있는 사건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을 미리 앞당겨서 오늘을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미래에 있을 세상의 종말이 오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 심판을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심판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심판을 통해서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지금 즐거움과 기쁨을 위해서 살아온 세월이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가 심판을 받아야 할 요소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람은 행동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기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선인가? 악인가?를 분별해서 선이라고 판단되면 선을 했으니까 내가 믿는 신이 그 대가로 무엇인가를 주시겠지? 라는 기대를 반드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하루의 행동에 문제가 없었는지를 돌이켜서 악한 일보다 선한 일을 더 많이 했으면 자신에게 쓰담쓰담 해주면서 내일은 아마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악한 행동을 더 많이 했으면 왠지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지요.

 

그런데 신앙을 이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타까워 하신다는 생각은 성경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죄짓는 것이 안타까우시다면 처음부터 선악과를 만들지 말았어야 합니다.

 

4:4-6절에 보시면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일을 한 자에게는 당연히 삯으로 대가를 받지만 일을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말로 경건하게 살지 않았음에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하게 살든지 악하게 살든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그 의를 믿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선을 행하면 복 받고 악을 행하면 벌 받는다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늘 자기 어깨에 무거운 짐을 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은혜를 주실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저주를 주실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런데 본문 10절에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라는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솔로몬은 본인이 수고해서 이런 대가를 얻어서 보람이 있고 기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마음이지요.

 

직장인들이 수고하고 노력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월급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성과를 올리면 연봉이 올라가는 재미로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대기업은 나이와 상관없이 성과를 올리면 그만큼 진급이 올라가도록 조직관리를 합니다. 40대임에도 상무를 지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몫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심판을 받으셨다는 기초위에서 아무런 한 일이 없는 나에게 주어진 영생의 복과 솔로몬이 누렸던 세상의 기쁨을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솔로몬이 기쁨을 위해서 수고한 모든 것은 바람을 잡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람은 실체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손에 잡히는 것 같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실체는 오직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기쁨은 무엇을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럽고 경건하지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