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아브라함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14)①
박성산 목사
2024. 7. 18. 13:12
아브라함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창22:1-12)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 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 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 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 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 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 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 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 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 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 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 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 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오늘날 신자들에게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교회에 나오면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소위 신자라고 하는 자들이 정작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거나 무지하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신앙생활을 정상적으로 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교회에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으로, 인격이 훌륭한 것으로, 아니면 하루에 몇 시간을 기도하는 것으로, 예배에 잘 참석하는 것으로 기준을 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다른 말로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예배에 잘 참석하고 기도를 몇 시간씩 한다고 하더라도 올바른 믿음을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겉으로야 얼마든지 자기를 꾸밀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 보기에는 얼마든지 신자 노릇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음이 있는 척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릅니다. 날마다 다가오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의 한계를 매일 매일 넘으면서 철저히 깨어지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구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시험이라는 겁입니다. 시험 없이는 나를 섬기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는지 판가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도 시험이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시험이 있다는 것은 어제까지 어떤 과정을 끝냈다는 겁니다. 그래서 또 다른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시험을 치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시험을 치루게 하신 것은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에게도 반드시 시험이 오게 될 텐데 한계에 부딪히는 경우가 있더라도 아브라함을 떠올리면서 잘 통과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시험이 어떤 내용인가 하는 것인데요.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시험이든지 갑자기 어떤 시험이 와서 기도와 성령이 도움으로 잘 통과해서 남는 것은‘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책을 통해서 안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사랑이시며 공의로우신 분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추상적이고 피부에 와 닿지도 않습니다.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 삶에서 시험을 통하여 느끼고 깨닫는 하나님은 분명히 차이가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시험을 당해서 결국 하나님은 어떤 분이심을 알았을까요?
2절에 보시면‘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제사에는 5가지가 있는데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가 있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다 태우는 것이고 소제는 다 태우는데 재물이 곡물이고 속죄제는 하나님께 지은 죄를 대속받기 위해서 제단 밖에서 태우는 것을 말하고 속건제는 이웃간에 지은 죄를 위해서 제단 밖에서 태우는 것이고 화목죄는 속건제를 드리고 난 후에 이제는 죄를 묻지 않고 화해하자는 뜻에서 벌이는 축제입니다.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는 제물의 일부분만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과 제사드린 사람과 제사드릴 때 수고한 모든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습니다.
근데 번제는 제물을 다 태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제물로 누구를 바치라고 하셨습니까? 이삭이지요. 100세에 얻은 귀한 아들을 불로 태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으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원래 제사라는 것은 그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그냥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니고 나 대신 누구를 제물로 바쳐서 그 희생 때문에 우리 죄를 묻지 않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죄 없는 의인이 되는 것이고 제물 되시는 분이 희생을 했기 때문에 내가 받아야 되는 저주를 그 분이 다 뒤집어 쓴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지만 아브라함은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소나 양이나 다른 제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을 바치라고 했는지 참 궁금했을 것입니다.
3절에‘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나무를 나귀 등에 지우고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에 갑니다. 3일을 걸어서 가는데 얼마나 아브라함의 마음이 착잡했겠습니까?
아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난 그날, 사라 품에서 새근새근 잠들고 있는 갓난아이의 얼굴, 이쁜 짓을 하면서 재롱부렸던 기억, 아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미소 짓게 하고 바깥에 나갔다가 집에 오면 와락 안기던 그 아들의 기억으로 밤잠을 설쳤을 것입니다.
두 노인 부부의 희망이었던 아들이었는데 이제 아버지가 아들을 직접 죽여야 하는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바치러 가는 그 시간이 절대적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기 전까지는 그 아들은 절대적 희망이었는데 이제는 희망이 사라져 버리고 절망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방법입니다. 절대적 희망에서 절대적 절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은 절망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게 아직 희망이 있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우상시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제사드리는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9-10절에 보시면‘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다음 주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