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이 전한 복음(마3:5-12)(9)
5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 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 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 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 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 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 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 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 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시대마다 선지자의 말은 객관적으로 볼 때 참으로 황당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당신만 하나님을 믿고 다른 사람은 다 엉터리란 말인가?"라고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설령 어느 누군가가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뭔가가 우리와 다르게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이겠습니까? 그러면 세례 요한이 복음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세례 요한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진짜냐 가짜냐를 가름할 수 있는 기준은 예수님이 증거하신 복음의 내용과 일치되느냐 아니냐로 판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해도 예수님의 뜻과 다르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오늘 본문에 세례 요한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마23:33에는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보고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같이 평가를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지옥에 갈 인간들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들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라고 보는 것을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같은 생각을 갖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두 분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꼭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으로 보실 수밖에 없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 그들은 거짓영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왕하22장에 보면 미가야 선지자가 나옵니다. 유다 나라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아합이 서로 손을 잡고 아람 나라를 치려고 했습니다. 과연 이번 전쟁에서 남북 연합군이 승리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 때 자기 나라의 선지자들에게 물어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려 400명의 선지자들이 모두다 이번 전쟁은 두 왕의 승리가 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런데 미가야 선지자는 전혀 다른 계시를 전합니다. 두 왕이 패배하고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400명의 선지자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하는 거짓 계시를 전하는 이유는 하늘에서 열리는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회의에 미가야 선지자도 참관을 했는데 거기에 있던 악마가 말하기를 "400명의 선지자들에게 악한 영을 보내어서 모두 거짓 계시를 말하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때 시드기야라는 거짓 선지자가 미가야 선지자의 뺨을 때립니다.
바로 그러한 거짓 선지자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자들이 바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보기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짓영의 세력 속에서도 복음은 전하십니다. 미가야선지자 시대에 무려 400:1의 비율로 복음을 아는 자가 극소수인 것이 사실입니다. %로 따져서 참된 선지자는 0.25%이고 거짓 선지자들의 비율은 99.75%입니다. 그러니까 거의 전부다 악한 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세상관으로 세상을 살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믿고 따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일까요? 세례요한도 이에 포함이 되고 있습니다. 그가 전하고 있는 복음이 무엇일까요? 본문 10절에 나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여러분, 성도에게 있어서 기쁨이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렵고 혼란스럽더라도 하나님의 생각을 확실히 알게 된다면 이 땅의 걱정은 그리 큰 일이 아님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본문의 배경이 아무리 2000년 전의 일이지만 마치 세례요한이 우리 눈앞에 똑똑히 보이는 것처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2절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 말씀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타작마당만 깨끗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확정된 뜻입니다.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모아 불에 태우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을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뜻에 무관심한 것일까요? 그것은 이 경쟁 사회에서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승리는 무조건 내 것이어야 하고 내 것을 계속 지켜야하고 확장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다보니 하나님의 뜻에는 무관심해지고 그저 자신의 힘과 재주와 능력 모으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을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있겠지요.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이 이런 자들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의 권력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악마의 특성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것을 나쁜 열매라고 보았고 그 열매는 하나님 보시기에 불에 태워지는데 곧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반대로 좋은 열매는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만 받는다고 구원이 될까요?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말하기를 진정한 능력자는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인데 자기는 비록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래서 좋은 열매는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다 받아야 구원이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고전1:17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물세례를 베푸는 것을 복음을 증거하는 행위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세례가 결코 구원을 결정짓는 거룩한 행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구원의 능력은 온전히 추가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필요치 않고 오직 십자가의 복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속에 세례가 다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눅12:50에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복음을 믿는 것이 예수님으로부터 불과 성령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마치 미가야 선지자가 하늘의 회의에 참관한 것처럼 이 세상의 결정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전하는 자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성도를 좋은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성령께서 불로써 예수님에게 임한 세례가 우리에게도 임하셔서 알곡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요한이 전한 복음은 지금 우리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흩어져 있는 알곡을 모으셔서 따로 모으시고 쭉정이 역시 따로 모아서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복음을 믿어서 알곡으로 하나님의 곡간에 참여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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