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차이
(마6:30-34)(30)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 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 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 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새는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직접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기를 염려하며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하여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사람은 어떠한 조건과 환경에서도 감사하면서 살수있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차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상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마6:19절에서부터 물질과 하나님을 나란히 비교하신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하나님만큼이나 크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물질임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서 물질이 주는 힘과 맞대결을 하고 있는 셈인 것이지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물질의 유혹에 이끌려 가고 있는데 성도는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는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것만 가치있다고 말하고 그 외의 것은 장식용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나라와 의는 돈으로 따질 수도 없거니와 돈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소망이 소망답게 해주는 것입니다. 역시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 자기 소망들을 갖습니다만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부서져버리는 소망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소망이라고는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소망이라면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아야 됩니다. 다르게 말씀드리자면 이 소망을 가지다가 다른 소망으로 바꾼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과 관련되어 있는 것에 소망을 두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또한 삶에 치명적인 상처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눅12:13~15에 보시면 어떤 사람이 형에게 유산을 빼앗긴 것이 원통해서 하소연하려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형에게 빼앗긴 자기 몫의 유산을 되돌려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15절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한 예로 설명하십니다. 17~21절에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끝부분을 다시 봅시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여기서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마음을 물질에 기댈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데려가면 그동안 자신이 모아놓은 재물로 인하여 자기 영혼을 되찾아오게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전부다 헛수고가 되는 것입니다. 즉 이 어리석은 부자는 살면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사는 겁니까?"를 진지하게 하나님에게 물어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즉 생명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재물이 많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생명이 없는 사람으로 분류될 뿐이고 생명이 있는 사람은 비록 재산이 적다고 하더라도 생명 있는 자로 분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생명이 없는 이방인들을 예로 말씀하십니다. "생명없는 이방인들은 저렇게들 살아가고 있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 31~32절에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예를 드신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이스라엘백성이 누구이며 이방인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이 인간들의 자질이나 족보에 의해서 능력의 점수에 따라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입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것이고 지옥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지 못한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 어떤 민족이나 사람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지 않았다고 한다면 모두 다 마땅히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천국이 별로 의미가 없는 나라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일부에게만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천국 가는 사람도 생겨나고 지옥 가는 사람도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만 그렇게 하셨습니다. 어떤 식으로 자비와 긍휼을 베푸셨는가하면 언약의 피를 뿌려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출24:5~8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언약의 피로 인하여 그들은 죄 용서함을 받는 자비를 받은 것입니다. 또한 출19:5~6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언약의 피 밖에 있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에 대한 자비와 긍휼을 입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죄가 그대로 있을 것이고 그 죄에 대해서는 냉혹한 저주가 임하게 됩니다. 왜 이렇게 저주를 하시는가 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세우신 맹세와 언약의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비가 자비다우려면 자비가 없음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줘야 자비의 능력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지옥에 가게된 것도 이스라엘보다 죄를 더 많이 지어서도 아니요, 이스라엘이 그들보다 더 깨끗하게 살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이방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오로지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주어졌다는 단지 이 이유 하나만으로 운명이 영원히 결정되어 버린 것입니다.
신9:5에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방인들 중에서 구원받은 자가 생긴다는 것은 무슨 근거로 된 것일까요?
사도행전에 보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유대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일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자비와 긍휼이 임하게 된 것은 원래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대상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완악해서 그 자비와 긍휼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거부했다는 말은 손사래를 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교묘하게 변질시켰다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으로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롬10:2~4에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 나라와 의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의지하고 믿을 때만 생겨나는 법인데 이들이 자기 앞에 있는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를 만들어보겠다고 한 것인데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 복종치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행함을 의지하다가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가 걸림돌이 되어 그만 그 돌에 의해서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그래서 그로 인하여 그 빈자리를 이방인과 같은 우리들이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롬11:17에서는 접붙임을 받았다고 표현하고 있고 롬11:25~26에 이로써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엡2:12에서는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라고 우리의 옛 주소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은 십자가의 놀라운 능력으로 이스라엘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도 역시 이방인과 같은 고민과 걱정을 늘 안고 있습니다. 장래걱정, 자식걱정, 남편걱정 등등 수도 없이 하고 살지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는 것일까요? 네 맞습니다. 우리는 순종할 수 없지요. 노력이라도 해보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지만 그게 어디 노력으로 될 문제인가요?
우리가 먼저 인식해야할 것은 물질에만 가치를 두는 세상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와 의는 우리의 그 어떤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 자비와 용서에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과 이스라엘백성의 차이는 예수님의 공로만을 믿느냐 아니면 나를 믿느냐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만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 백성이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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