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환란을 주시는 예수님(42)

박성산 목사 2016. 6. 5. 23:58

환란을 주시는 예수님(마8:23-27)(42)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 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 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 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고자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신 장면입니다. 건너 가던 중에 갑자기 어디선가 광풍(막4:37)이 불어서 물이 배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제자들이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워서 살려달라고 하자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꾸짖으시고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상치도 못했던 풍랑이 왜 일어난 것일까요? 우연일까요? 아니면 그 풍랑이라는 사건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을까요?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이 세상에서 뜻을 펼치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뜻을 진행하시는 과정을 우리가 잘 알수 없지요. 그것은 우리가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내 것을 지키고 더 많이 모으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자신을 뽐낼 수 있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살다가 갑자기 예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면 당황하게 되고 곧장 위기를 느낍니다.

‘어,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되는데... 그동안 쌓아왔던 것이 허물어지면 안되는데..’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성도에게 이런 위기를 만드십니다. 더이상 ‘예수 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에 속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요. 왜냐하면 위기를 통해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세상에서 진행하시는 정상적인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행13:48에 보시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하나입니다. 세상에 흩어져 있는 자기 백성을 더럽고 추한 죄악의 세상에서 구출하는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내 것’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사고방식이 무너져야 합니다. 어떻게 무너져야 할까요? 바로 이 점을 보여주기 위하여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상치도 못한 환란을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다른 말로 어려움이 없고 편안할 때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따라왔었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이란 말입니다. 아마 환란이 없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두 가지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물리적인 한계입니다. 누군가가 절벽에서 떨어지면 다치거나 죽게 되어 있습니다. 어깨에 날개가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또한 요즘에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 때문에 호흡질환을 앓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요. 미리 준비를 하면 참 좋겠는데 그럴 방법이 전혀 없고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한계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마스크를 사용해봅니다만 호흡은 코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피부도 숨을 쉬고 있습니다. 어쩔 수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한계인 것이지요.

또 하나는 심리적인 한계입니다. 남들이 내게 욕을 하면 순간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폭력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상대편에서 아무런 물리적 공격을 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항상 환란이라는 것이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몰아쳐 옵니다. 흔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아무리 환란이 있어도 자기에게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그것은 혼자서 바라는 상상일 뿐입니다.

 

이런 성도의 환란에 대하여 롬5:3-4에 보시면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줄 앎이로다”

이 말씀에서 환란이 없으면 소망을 하기는 하는데 엉뚱한 것을 소망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솔직히 환란이 없고 인내와 연단이 빠지면 당연히 소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소망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오직 자기의 즐거움만을 위하지 않겠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죄악에서 구원하는 과정은 환란을 주셔서 그 환란을 통해 인내와 연단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소망을 가질 수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란을 주시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만 사람은 큰 기쁨이 앞에 있으면 마음이 설레게 되어 있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다면 그냥 회피하거나 도망가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정말 천국에 대한 설레임이 있다면 지금의 고통을 마냥 외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과정이 성도로서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는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란은 한번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합니다. 죽을 때 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환란은 사람마다 다르고 환경에 따라서 다르게 마련입니다. 부잣집의 환란과 가난한 집의 환란이 서로 다릅니다. 누가 더 환란이 많은가는 비교할 필요 없습니다. 본인이 겪는 환란이 제일 괴롭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란이라는 점에 동일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자 자신에게 인내와 연단을 가져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성도의 길을 보여주는 사건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이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서 파도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를 덮쳤습니다. 과연 이 제자들이 이 풍랑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있다면 무엇일까요?

 

 흔히 교인들이 생각하기를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어떤 위험한 상황도 자기만은 예외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평소에 자신이 나름대로 해왔던 선한 일들을 내세우게 됩니다.

“저는 평소에 나름대로 이런 저런 착한 일을 했으니까 이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게 해 주십시요”라고 기도를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주일 예배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자신의 착한행위’로 인정이 되어서 앞으로 닥칠 환란에 대한 대비로 생각하거나 그냥 지나치기를 기대하신다면 다른 말로 세상 사람들이 지내는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예배를 드리신다면 곤란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풍랑이 여러분의 가정과 사업체와 몸이나 심지어 교회에까지 반드시 덮칠 것입니다.

 

그래서 환란이 오고 어려움이 오면 올수록 천국의 가치는 더 높아집니다. 고사를 지내는 마음으로 환란이 내게서 빗겨가기를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환란이 찾아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내용은 제자들의 무서움이 아니라 믿음이 적음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한 것을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이 적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예수님을 조금밖에 의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아는 그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풍랑이 잠잠해지고 나자 제자들이 생각하기를 27절에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라고 했습니다. 방금 전까지 그들은 분명히 예수님이 필요했고 그래서 잠자고 있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다급한 나머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 예수님의 누구신가에 전혀 관심은 없고 그저 119에 신고하는 마음으로 일단 “주님”을 찾기 바쁩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처해진 일을 해결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위주의 믿음을 가진 자라도 하나님은 사랑하는 성도에게 예수님을 알려주십니다. 어떻게요? 바로 환란을 통해서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환란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을 모른채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세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처럼 환란은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요, 사랑의 시작인 줄 믿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여러분, 성도는 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환란에서 도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것을 지키기에만 연연해 하실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더욱 더 깊이 아는 도구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환란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환란은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비춰주는 거울이라 믿으시고 사정없이 몰아치는 광풍일지라도 ‘아 주님은 이런 분이시군요’라고 고백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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