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심판의 기준(67)②

박성산 목사 2016. 12. 12. 01:44

심판의 기준(마12:30-32)(67)②

 

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 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 지 못하리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심판의 기준은 우리가 계명을 지키지 못해서 혹은 거룩하지 못해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를 받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심판받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또한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사람들은 선악체제로 세상을 살게 되는데 어떠한 행동을 할 때에 이것이 옳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로 구별하면서 살게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 옳다고 판단되는 것은 열심히 행하면서 자기의 옳음을 만족하면서 살 것이고 나쁘다고 판단되는 일은 하지 않음으로 나름대로 뿌듯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잘나서 행하고 또는 행하지 않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고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의 용서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을 성경에서는 성도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택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사람편에서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용서를 받는 방법은 전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용서하심에 늘 감사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용서의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2절에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시는 것은 그들의 선행이나 윤리나 도덕을 잘 행해왔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해서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편에서 용서의 은혜로 인하여 귀신들려서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낫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계명을 잘 지켰는지, 못 지켰는지 전혀 예수님은 묻지를 않으십니다. 오직 예수님의 용서를 베푸시는 데에만 집중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놓고 바리새인들은 24절에 나오는 것과 같이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이것은 마귀가 한 일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용서를 인정하면 자기들이 평소에 강조하던 ‘계명을 지키면 구원과 복 받습니다. 계명을 못 지키면 저주를 받습니다’.라고 가르친 것이 예수님 앞에서 전부다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에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들 바리새인들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렸던 선악체제를 가지고 최고의 완전한 노력을 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자신이 있었으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기를 ‘저는 십일조 했고 금식했고 구제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지금 그런 바리새인들이 누구를 죽이려고 합니까?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가 신념을 가지고 행한 것에 대해서 목숨도 바칠 수 있는 것이 본성입니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지요.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은 분들을 역서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데요. 그들에게는 그것이 선입니다. 그런데 목숨을 바쳐서라도 선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그것은 다 헛된 것이고 예수님의 용서외에는 의가 없다라고 한다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아마 분노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바리새인같은 의식을 가지고 학교와 가정에서도 그런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러한 의식 속에서 자기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평생을 자신의 욕망이라고 하는 선을 행함과 악을 행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죄를 많이 지은 자신을 평가한 나머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서 스스로 벌을 가하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식이 있는 한 예수님께서 하신 용서와 나를 의롭게 하셨다는 말씀의 감동이 와 닿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말씀이 거추장스러울 것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심판 주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래서 심판의 기준을 알려주고 나서 심판을 하시고자 하시는데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지금까지 선악체제로 살던 사람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죄인가요? 무조건 용서하심에 그 보배로운 사랑을 감사하지 못하고 그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 죄이고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예수님이 심판 주이심을 믿지 못함은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본문 31-32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이 말씀에서 인자와 성령이 나오는데요. 인자는 단7장에 심판주로 나옵니다.

 

그런데 심판주로서 이 땅에서는 어떠한 모습으로 나오는가 하면 사 53:1-4에 의하면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와같이 인자되시는 분은 아무도 이해 못하는 모습으로 오셔서 말씀을 완성하셔야 심판주로서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힘이 세거나 권력을 거머쥔 모습이 아니라 약한 모습, 매 맞는 모습, 무시당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가진 예수님을 심판주라고 어느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 상상도 못 할 일일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인자인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성령이 올 때까지는 인자를 몰랐다는 것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초라한 예수, 무시당할만한 예수,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사53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죄’때문이랍니다. 우리의 질고로 인하여 우리의 죄로 인하여 대신 채찍을 맞고 멸시를 받고 천대를 받는 고난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는 인자에 대해서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아무 대가없이 그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하심에 대해서 그 기준에 대해서 알려주시는데 그 용서를 거부하면 다른 말로 ‘선을 행하면 되지 굳이 예수님의 용서가 왜 필요한가?’라고 끝까지 고집한다면 성령의 용서가 없다는 즉, 성령을 훼방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저 주시는 그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선이나 악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하심만이 심판의 기준이 됨을 믿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의 표적(69)  (1) 2016.12.27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68)  (0) 2016.12.19
심판의 기준(67) ①  (0) 2016.12.06
강한 자를 결박하심(66)  (0) 2016.11.28
상한 갈대와 이방들(65)  (0) 2016.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