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좋은 씨와 가라지의 해석(78)

박성산 목사 2017. 3. 13. 00:56

좋은 씨와 가라지의 해석

(마13:36-43)(78)

 

36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 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것 같이 세상끝에도 그러 하리라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 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능력으로 창조를 했느냐하면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 하셨다고 합니다. 이 능력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하면 겉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만드셨군요. 참 감사합니다.’라고 합니다만 속으로는 ‘그런데요. 이렇게 천지창조를 하신 것은 고마운 일인데 나의 일에 관해서 이러쿵 저러쿵 간섭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가 알아서 한번 잘 살아볼게요. 제 인생은 소중하니까요’ 라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자식을 키우다 보면 쉽게 볼 수가 있지요. 자식에게 말하기를 ‘얘야, 엄마는 너를 낳기 위해서 10달 동안 고생했고 네가 필요한 기저귀와 예쁜 옷과 장난감들을 장만해놓았단다.’라고 하면 자식은 ‘엄마 아빠, 저를 이렇게 낳아주셔서 참 고마워요. 하지만 부모라는 이유로 내 인생에 더 이상 간섭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집을 가지고 성경을 아무리 많이 보고 신앙생활을 해보았자 제대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자존심이나 자기의 자리를 누구에게든지 빼앗기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허구를 쫓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가라지를 심은 마귀가 심어준 허구라는 선물의 짐을 짊어지고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훌륭한 사람이야.’ 이러한 나를 보호해야 된다고 하는 생각은 허구일 뿐입니다.

 

마치 티비에 나오는 슬픈 드라마를 보면서 같이 슬퍼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다가 티비를 끄고 나면 언제 슬퍼했느냐는 듯이 티비속의 주인공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 곧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늘 고통 속에서 살지요. 왜 그럴까요?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기대하기 때문에 오늘이 괴롭고 모레를 기대하는 바가 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봐 오늘을 초조해 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의 자리’라는 울타리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람이 자기의 자리가 이미 확보된 이상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이나 심지어 하나님이나 예수님일지라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하22:2-3절을 보시면 다윗이 고백하기를 “가로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라는 고백은 다윗은 이미 자기의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존재라는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자리를 차지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자리는 이제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다보니까 깨닫게 된 것은 나의 반석은 내가 아니라는 것, 나의 요새는 내가 아니라는 것, 나의 피난처는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만들어 낸 과학과 문명과 학문과 예술은 모두 내가 나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구어 낸 허구들입니다.

 

오늘 본문 38절에 보시면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라고 나오는데 천국의 아들들은 세상에서 어떤 자들이며 악한 자의 아들들은 누구이고 가라지를 심은 마귀는 어떠한 역사를 할까요?

 

우선 여러분이 기억하셔야 될 것은 이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자신을 천국의 아들이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한다고 해서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힘으로 천국의 아들로서 구원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구원을 얻었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해봤자 책임질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이유는 설교서두에 말씀 드렸듯이 천지창조를 누가 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시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창세기만 창조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도 이루어 내시더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능력을 멈추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존재의 기반 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씨는 사람이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본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좋은 씨를 뿌려놓고 열매를 거두는 과정이 내용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뿌려놓고 하나님이 거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도 씨를 뿌리지만 가라지입니다.

 

 그러면 좋은 씨인지 가라지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오셔서 천지를 창조했던 능력으로 좋은 씨를 뿌려놓고 열매를 거두시니까 천국의 아들은 자신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는구나를 깨닫게 되는 사람은 좋은 씨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구원된다는 것을 믿는다면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라는 고민은 없어져야 하는데 만약에 아직도 고민을 한다면 여전히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고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세상에서 어떻게 좋은 씨앗의 열매를 거두실까요? 눅15장에 보시면 세 가지의 비유가 나오지요. 첫째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대한 사랑의 비유이고, 두 번째는 어떤 처녀가 동전을 잃어버렸는데 밤새도록 마당을 쓸어서 찾는 기쁨을 다음 날 친구들과 잔치를 벌였다는 비유입니다. 세 번째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버지는 늘 곁에 있는 큰 아들보다 잃어버린 둘째 아들이 되돌아오기만을 고대하는 비유입니다.

 

이 세가의 비유를 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하면 ‘나의 선함과 노력과 힘으로 구원을 이룰거야’라고 믿는 사람은 모두 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고, 잃어버리지 않은 동전에 불과하고 늘 아버지의 곁에 있는 큰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존재의 의미를 두는 사람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연히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멀어졌구나. 이제는 소망이 없구나’를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오히려 찾아와 주시는 자, 찾아와서 건져주시는 자, 면목이 없지만 아버지 밖에는 의지 할 곳이 없음을 알고 아버지가 아닌 하인으로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처절한 고백으로 돌아왔을 때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주시는 하나님은 하늘에서 잔치를 벌일 정도로 기뻐하심으로 좋은 씨의 열매를 거두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에 나오는 천국의 아들들과 가라지를 보면서 천지창조를 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자기의 일을 쉬지 않고 반드시 일을 이루시는데 잃었다가 다시 찾는 방법 그 이외는 하시지 않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기의 행함을 자랑하지 않을 것이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자랑할 줄 믿습니다. 드디어 자기의 자리가 빼앗기게 됨을 감사하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에게는 오늘이 창조의 날이고 불신자에게는 오늘이 심판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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