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소경임을 인정하는 자(89)

박성산 목사 2017. 6. 12. 15:57

소경임을 인정하는 자

(마15:12-20)(89)

 

 

12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 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 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 대

15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 소서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 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 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 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 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러 이 땅에 오셨는데 그러면서도 사람에 대하여 비난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부족한 것을 잘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이 자꾸만 부담을 주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본문 19절에도 나오듯이 죄를 계속 들추시는 것이 나옵니다. 그냥 단순히 ‘너희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러 왔으니까 잘 믿고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시면 될 텐데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들의 죄를 들추고 부끄럽게 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부터 챙기고 사랑하고 그 다음에 여유가 생기면 예수님을 사랑하겠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자기사랑에 집착하는 우리를 잘 알면서도 ‘너희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라고 하는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본문을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자기의 잘못을 수정하고 반성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될 만한 자격이나 요구조건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착하게 살겠습니다.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로 대응하기에 바쁩니다.

 

 사람은 자신을 사랑함에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스스로 인간되기’입니다. 즉, 착하게 살기, 바른 생활하기, 단점은 줄이고 장점은 업그레이드 시키기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이런 법을 만들어서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앞에 나와서 ‘주님,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이만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격이 있겠지요?’라고 묻는다면 이것은 옳은 깨달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을 개선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 인물로서 바리새인들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재건축을 위해서 건물을 부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사람과 청소만 하러 온 사람의 목적은 다릅니다. 청소하러 오신 분은 깨끗하게 쓸고 닦으면 됩니다만 기존의 건물을 아예 부수고 재건축하기 위해서 온 사람은 남김없이 다 처리를 해야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아예 재건축하시러 오셨는데 사람들이 청소한답시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말씀을 지키도록 노력하자. 그렇게 성화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복 주시겠지...’ 라고 한다면 그게 예수님과 상관이 있는 일일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은 우리가 스스로 자기를 정화를 하고 착하게 산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19:16-22절에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부자청년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써 자신이 선을 행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정도면 되지 않느냐고 자부하고 있는데요. 그러자 예수님은 계명을 아무리 잘 지키거나 자신의 행동을 개선한다고 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의’가 주어질 때만 그 현장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편에서 어떻게 처신함에 따라서가 아니라 예수님편에서 주어져야합니다. 이것을 믿는 부자청년이었다면 이때껏 자기가 지켜온 모든 것(자기의 의)을 버리고 심지어 물질까지 버리면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부자청년은 ‘나를 따라 오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이 부자청년이 그동안 계명을 지켜온 것이 자기사랑의 한 방편이었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자기만족으로 산 것이지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예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믿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약에 천국에 가는 것은 나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자기사랑은 포기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신 예수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분에게 달려 있으니까 그 분만을 믿고 따르고 의지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로는 되지 않습니다.

본문 18절에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따로 나올 수 있을까요? 상황에 따라서 누가 나를 칭찬해주고 존경해주면 좋은 것이 나오기도 하고 비유가 상하면 자기도 모르게 나쁜 것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것이 같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자기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은혜로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데 그 말씀을 따라 살면 살수록 선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계명을 지키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자기가 착한일을 하면 자기의 죄가 줄어든다고 생각합니다. 착한일을 하면 죄가 저 멀리 도망간다는 거지요. 반대로 죄를 지으면 착한마음은 주눅이 들어서 저 멀리 간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줄다리기처럼 끌려가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과연 선을 행하면 마음이 깨끗해질까요?

 

본문 19절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 죄의 항목들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이 7가지의 죄를 짓지 않았다고 자부한다면 부자청년과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계명을 지킴으로 자기를 정화했다고 스스로 만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5:19-21에 보시면 죄의 항목이 좀 더 많이 나오는데요.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 말씀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이 죄는 지었기 때문에 찝찝하고 저 죄는 안 지어서 좀 안심이 되시나요? 다르게 말씀드리면 이 죄는 지어서 나쁜 마음이고 저 죄는 안 지어서 착한마음이 아니라 도대체 나도 모르게 죄를 짓게 만드는 이 마음을 가진 내가 누구인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왔는가? 내가 얼마나 절제를 하며 살아왔는가가 아니라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 말입니다.

 

이것을 외면한 채 살아온 사람들을 예수님은 소경이라고 하십니다. 본문 14절에 소경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소경은 시력이 나빠서 멀리는 못 보지만 가까이 있는 것을 보는 것도 아니고 빛과 어두움 자체를 구분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마음의 더러움이 자기들의 노력과 정성으로 깨끗하게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눈이 떠 있어도 소경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소경이 그 누구를 인도하면 함께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요9:39-41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이 말씀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할 것이지만 ‘보는 자’ 즉, 스스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주님이 보시기에 잘못 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소경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자기가 소경인 것을 아는 자입니다. 아무것도 분간을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해야 눈을 뜰 수 있나요?라고 하면 곤란합니다. 눈을 뜨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들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성령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이 소경으로 살다가 느닷없이 찾아온 빛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눈이 뜨이게 되고 빛과 어두움을 분별하게 될 뿐만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악한 생각을 나의 선으로 채우려고 했던 것이 모두 헛된 수고에 불과하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완전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을 정화하면서 살지 맙시다. 다만 우리가 어느만큼 죄가 가득한 죄인이라는 것을 보면서 이런 나를 아무런 댓가없이 사랑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체험하실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