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통곡하는 베드로와 예수님(167)②

박성산 목사 2019. 2. 24. 23:38

통곡하는 베드로와 예수님

(마26:69-75)(167)②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 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 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 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베드로를 통하여 ‘일단 나는 살아야한다, 일단살고 보자’는 속성을 그 누구나 가지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종교를 가지는 것도 나를 위해서, 살아야한다는 열망 때문에 선택하는 하나의 도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베드로와 별 다를 바 없는 속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오늘도 나를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척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러한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결정적인 순간을 만난 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세 번을 부인하는 순간 닭이 울었기 때문입니다. 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됩니다.

 

행 9:7절에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바울은 무슨 소리를 들었을까요? 행9:4-5절에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바울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다메섹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가는 도중에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음성을 바울은 똑똑히 들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우레와 같은 소리로만 들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자 소리는 들었는데 바울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소리로만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들이 속한 세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서 닭이 울었습니다. 닭은 울고 싶을 때 우는 것인데 닭이 운다고 해서 같이 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닭이 우는 것을 사람들은 그냥 소리로만 들었습니다만 베드로는 닭이 우니까 밖에 나가서 통곡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마 26:34에서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자신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짐의 사실 앞에서 예수님께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든 것입니다. 그런데 닭의 울음소리에 그러한 마음이 들었다는 것은 예수 안에 속했다는 증거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약속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더라면 비록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고 닭이 울었더라도 우연의 일치로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홍해가 갈라진 사실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리 하셨다고 믿고 있는데 이방 사람들은 그냥 우연의 일치로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닭이 울 때에 베드로가 울고 싶어서 운 것이 아닙니다. 마 16:17-18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의 이름은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은 베드로의 운명과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의 소유로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 32장에 보시면 야곱이 나오는데요. 그는 타고난 성격대로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 죄의 속성을 마음껏 펼치는 모습이 나옵니다. 남에게 지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사람인데 그가 천사를 만나서 이름이 바뀌어요. 이스라엘로...

 

그리고 복을 주겠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 역시 베드로처럼 이스라엘로 살게 해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가지고 태어난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끝없는 욕심을 채우며 삽니다.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후로도 말입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믿게 되면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죄가 다 나오게 됩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다윗도 그러했고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도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와같이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사람이 변하고 인격이 변해서 예수님의 품성을 닮는 것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말씀을 지켜서 천국에 간 사람은 세상에 한 명도 없어요.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에 간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롬 8:1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이란 말씀은 마치 풍선 안에 우리가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를 것인데요. 풍선이 빨강색이면 그 안에 있는 우리도 역시 빨간색으로 보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즉, 이 풍선 안에서는 어떠한 죄도 죄로 보지 않고 의로 본다는 것입니다. 풍선이 죄를 가리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내가 예수 안에 있는 것은 주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지 나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님을 믿어지신다면 그가 바로 예수 안에 있는 성도인 줄 믿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지옥에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걱정이 된다면 본인의 신앙에 대해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죄를 지어도 그 죄에 얽매여서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롬 6: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여러분이 오늘 베드로를 보시면서 ‘나는 배신하지 말아야지...’라고 이해하고 결심하시면 ‘예수 밖’에 있는 자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베드로처럼 나도 매일 예수님을 배신하며 살고 있구나’를 깨달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안에서는 이미 영생을 얻은 성도로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잃어버릴 수 없음을 믿는 자인 줄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아무도 들을 수 있으나 누구나 들을 수 없는 생명의 닭 울음의 소리는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없이 쳐다보시는 시선은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매일 배신 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알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 의지하는 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