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

이세벨을 용납한 교회(14)

박성산 목사 2020. 2. 11. 12:42

이세벨을 용납한 교회

(계2:18-23)(14)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 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 내가 네게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 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 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 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 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 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 운데에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 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 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오늘 말씀도 역시 교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교회라는 것은 항상 예수님이 보고 계시면서 징치까지 하시는 대상이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 18절에 ‘그 눈이 불꽃 같고’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는 예수님이 말씀으로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면서 성도인 교회를 이끄시는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주님은 우리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반항하고 싶고 따지기도 하고 싶은 때도 있겠습니다만 진정한 교회는 세리와 창기, 간음한 여인, 과부,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들을 보고 예수님은 천국은 바로 너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후 5:14-15절에 보시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분을 위하여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와 닿으신다면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데 신앙을 마구 이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 세월동안 만난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식으로 성숙되고 바른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가치가 높아진 것에 의미를 두고 있는 사람들을 숱하게 만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교회는 자신의 가치에 의미를 두기보다 미천한 죄인인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 분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변화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창 22장에 보시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칼로 죽인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일은 믿음이라고 하는 능력이 아브라함을 그리 순종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장면이 순종하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아디라 교회가 칭찬하는 내용도 나옵니다만 책망을 듣는 내용도 나오는데요. 지난 주에는 발람 선지자가 나왔는데 오늘은 자칭 여선지자 이세벨이 나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을 아시려면 왕상16장부터 왕하9장까지 보셔야 이세벨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때에 벌어진 일이 이 시대에도 똑같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엘리야 시대인데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아합왕과 결혼할 때에 바알이라는 이방종교를 가지고 와서 이스라엘 모든 땅에 우상화를 시켰습니다.

 

바알의 특징은 여러 교리가 있습니다만 한마디로 정성껏 바치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이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본문 20절에 ‘행음’이라고 나오는데요.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이 복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듯이 바알을 섬기는 의식을 할 때에 여 사제들이 남자신도들과 남 사제들은 여자신도들과 함께 성행위를 하는 것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제사의식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이 믿는 신과 합의 일치됨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교회에서 ‘기도 많이 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기도가 부족해서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헌금을 많이 하세요. 그래야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물질의 복을 못 받는 것은 아직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바치세요. 바친 만큼 복을 받습니다.’라고 하는 교회가 있다면 바알을 섬기는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교회는 부흥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열심히만 하면 복을 받는다고 하니까 사람의 본성에 맞는 것이지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주니까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본문에 그런 인간의 본성을 자극해서 드러난 행위들을 예수님이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인들 가운데서 은혜를 주심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셔서 바알을 섬기면서 살았던 나를 주님의 공로와 사랑과 용서를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두아디라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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