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하나님의 사람을 축복하는 자(9)①

박성산 목사 2024. 6. 11. 11:55

하나님의 사람을 축복하는 자(12:1-4)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 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 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 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 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우리가 살면서 힘들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낯선 사람과 사귀는 것입니다. 학교 동창이나 이웃, 같은 고향 출신이면 그나마 사귀는 것이 좀 나은데 연고가 전혀 없는 사람과는 공적인 관계라도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지요.

 

제가 설교 서두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신앙은 만남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전혀 모르고 있고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어떤 분과 만나게 되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지 상관없이 내가 그 분을 알고 그 분이 나를 아는 사귐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만남이라는 것을 내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원해서 만난 하나님이라면 내가 필요한 것을 채워주기 바라는 우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아시리라 봅니다.

 

지난 시간에 사람들은 자꾸 탑을 쌓으려고 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물질을 더 쌓으려고 하고 자기의 명성을 더 높이려고 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만나려고 합니다. 누구를 위해서일까요?

 

모든 시작과 끝을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까지 가보겠다는 욕심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그 모든 것이 바벨탑을 쌓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건 신앙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스스로 교만하게 만드는 것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시고 바벨탑을 쌓는 것은 복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12장에 진정한 복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복이라는 것은 내가 무엇을 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물질을 쌓고 정성을 쌓고 열심을 쌓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복을 주실까요?

본문 3절에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선택해서 그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시고 그에게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하는 방식으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해 드리자면 본문에 아브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요. 아브람으로서는 고향을 떠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구나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음성만 믿고 간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무모한 짓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이끄시는 능력으로 아브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정하고 택함을 받은 아브람을 받아들이면 축복을 받고 인정하지 않고 거부한다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방금 제가 복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요. 그럼 이제부터 방법을 알았으니까복을 받기 쉽겠네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무조건 받아들이면 되니까요. 교회에 나가서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세례받고 예배를 잘 드리고 헌금을 믿는 표시로 정성껏 하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도 바벨탑을 쌓은 것임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자기를 위한 천국을 가겠다는 욕심에 불과하니까요.

 

실제로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택하신자, 즉 보내신 자를 거부한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만나기만 한다면 영접하고 주인으로 모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하나님이 보내신 자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모습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고 눈높이가 맞는 사람과는 사귀기가 쉽고 가까이 하기가 부담스럽지 않지요.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모두 틀리다고 지적을 하거나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가치관과 너무 다르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거부하고 스스로 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한 행위로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누구나 환영하는 모습이 아니라 초라하게 오셨습니다. 싯다르타같이 왕자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구름을 타고 이 땅에 오신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당시 유대인들은 바나바를 선택했고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비록 강도지만 바나바를 죽이는 것보다 아무 쓸모없는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버린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런 유대인들을 비웃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보는 시선이 오늘날 우리의 시선과 다를 게 있을까요?

 

사람들이 원하는 복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통해서 부자 되기를 원하고 병이 낫기를 원하고 출세하기 원하고 가정에 문제가 없기를 바라고 만사형통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복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기를 바란다는 사실입니다.

 

10:29-30절에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누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부모나 형제나 자식과 전토까지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 즉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우리의 힘으로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