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과연 금식할 수 있나
(마6:16-18)(26)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하나님은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하십니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언가가 움직이면 살아있는 것으로 인정하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을 때는 죽은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죽음으로 보십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활동을 많이 하고 애를 쓰고 노력하고 성실해도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미 죽은 자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수시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하는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미 끊어진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조차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 살아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 말씀이 사실일까요?
마22:29-32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찐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부활의 차원에서 우리를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천사와 함께 있습니다. 어떻게 이들을 죽은 자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산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반대로 보면 이 세상에서는 산자가 있지만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어디까지나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세상적인 기준에 맞추어 살다 보니까 이 세상적인 영광에 비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다는 것을 느끼고 늘 실망을 할 수 밖에 없음을 보게 됩니다. 오직 세상의 기준으로만 사는 사람들에게는 남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데 이 모든 행동에 숨겨진 동기가 바로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도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열심히 노력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람 만나는 것도 두렵고, 직장에 가는 것도 두렵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서 두렵고, 내 자식이 밖에서 무슨 일을 저지를 줄 몰라서 두렵고, 10년 후에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 몰라서 두렵습니다. 이런 두려움이 주는 압박에 시달려서 그들은 오늘도 분주하게 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살아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두려움에서 살았지만 그들은 무언가가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이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했을까요?
요일4:18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사랑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에게 좋은 것을 베푸실 때만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드러내시면서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는 정도까지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결코 우리보다 인격이나 윤리적으로 나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일의 전부라고 믿고 순순히 받아들인 것뿐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의롭게 되었고 천사들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참으로 힘든 인생을 살아갑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경쟁자로 봄으로 그들과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더 착해야 되고 교회에서는 더 봉사해야 하고, 더 충성해야 하고, 더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하는 부담을 짊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지켜내겠다는 인간적인 신념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불안한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의 일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금식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공로로 삼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부담을 갖고 싫어하는 행위를 함으로 하늘의 상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자신이 두렵다는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40일 금식을 두 번 했더니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케 하셨다고 자랑을 합니다. 한 번도 하기 어려운데 두 번 씩이나 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뿌듯했을까요? 하지만 그 분은 금식을 했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었다고 믿는다면 금식을 두려움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마음속에 '교회에 사람들이 안 오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 말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보실까요?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지 목사의 소유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말씀 하십니다.
"금식하려거든 차라리 머리에 기름을 바르라"(마6:17)고 말입니다. 즉, 사람들이 금식을 할 때에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통해서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이 속에 품고 있는 목적을 주위 사람과 하나님에게 알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형식으로나마 머리에 기름을 바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대단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노력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으로 볼 수 있을까요?
사58:6~8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진정한 금식은 하나님께서 대단히 만족하시고 그 금식에 따른 결과대로 능력을 부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금식은 그저 굶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압제 당하는 자를 풀어줄 수 있는 능력으로 작용해야만 합니다.
이런 금식을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가 금식하면서 머리에 기름만 받으면 압제당한 자를 풀어낼 만한 능력이 생긴다는 말씀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금식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그 어떤 사람이 금식을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금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금식은 그 금식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주시는 방법으로 실질적인 구원의 효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한 구원의 금식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만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죄의 압제에서 벗어나야 될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4장에서 예수님이 금식하시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은 그 어떤 사람도 금식으로 인해 떡의 유혹에서 물리칠 수가 없음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진정한 금식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금식만 인정하는 금식이요 동시에 자신의 금식에는 결코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이 진정한 금식인 줄 믿습니다.
차라리 우리는 굶어죽어도 마땅한 죄인임을 절감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금식을 한다는 것에 의해서 우리가 인정받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의 고난 때문에 구원받았음을 인정하는 고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흉악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죽은 사람에서 산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금식은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의 금식을 능히 감당하신 것입니다. 사랑이란 온유하고 화평하며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랑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산 사람으로서 누구를 만나든지 싸워 이기거나 그 사람을 굴복시켜서 나의 하수인으로 만들려고 하지 마시고 그저 주님의 사랑을 전해줄 사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되었으면 그 사랑만을 자랑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금식에 참여하는 것이고 산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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