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마6:9-15)(25)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 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는데 막상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나의 살아 온 것을 살펴보면 전부 다 내가 판단해서 나의 힘으로 살아왔고 내가 성실하게 살아온 결과로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인데 하나님이 인도하심으로 현재의 내가 있다라는 고백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볼 수가 있습니다만 실제 우리의 삶에서는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고 달랑 나만 혼자 우두커니 있는것만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는 느낌을 평소에 받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가 아니겠습니까?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그냥 한번 답답해서 불러보는 것이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이 눅눅히 젖어가면서 사는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과 상대를 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와 상대를 합니다. 창3장에 보면 여자의 후손 즉 남자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태어난 예수님과 마귀와의 전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말릴 수는 없습니다. 그럴 위치도 아니지요.
그런데 마귀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엡2:1~2에 보시면 마귀는 온 인류의 마음을 모두 다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후4:4에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은 뭔가가 남들보다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신이 예수그리스도를 중요하게 여기지를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방금 읽었던 엡2:1에서도 너희도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살았던 너희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떤 사건과 비교할 수 있냐고 하면 출14:21~25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너게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마귀는 모든 인류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태에서 불도져로 모든 사람들을 낭떠러지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가 등을 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떠밀려가면서 새해를 맞이하기도 하고 아들 딸 장가보내고 시집보내고 맛있는 음식 먹으러 다니고 즐기면서 자기도 모르게 떠밀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알 수 없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죽음 앞에서는 버틸 장사가 없습니다. 아무리 살아생전에 기쁨과 행복을 느껴도 몸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렇게 예쁜 아들과 딸도 내가 죽고 나면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애써 모아놓은 물질도 죽고 나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귀여운 손자 손녀도 내가 죽으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몸이 있어야 느낄 것이 아닙니까? 몸이 없어지면 그동안 느껴왔던 행복과 기쁨도 함께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남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죽음으로 떠밀려 가면서도 세상의 유혹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마귀가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그 다음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마귀의 손아귀에 붙잡힌 우리를 구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는 구원 그 자체의 의미도 귀중함을 몰랐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와서 저 세상에 속한 후에 비로소 이 세상의 정체가 보이는 것이지 다른 말로 안에서 바깥으로 나와야 안이 보여서 '뭐가 잘못되어 있구나'를 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왜 잘못되었나?"하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주고 세상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 나갈 일이 뭐가 있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쁘다기 보다 아직 다른 세상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나와서 저 세상에 속하고 보면 "아.. 그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니구나"를 알게 되는데 그런 세계를 만나 보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를 나가도, 예배를 드려도, 헌금을 해도 오로지 자기생각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늘 외워왔고 설교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자와 하나님의 나라를 만난 사람들은 주기도문을 어떻게 이해를 하고 있을까요?
첫 번째로 나오는 내용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자세하게 알기 위해서 십계명(출20장)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계명에는 하나님의 뜻이 다 담겨 있습니다. 일계명이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입니다. 그러면 "나"라고 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오직 하나님만 모시면 만사형통으로 복을 주시는 분입니까?
출20:2에"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굽에 살고 있던 백성을 홍해를 건너게 해서 가나안으로 가게 하신 것이 너의 뜻으로 된 것이 나이라 하나님의 능력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의지와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이미 구원받은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계명이기에 이제는 마귀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무한한 감사할 수 있는 것에 십계명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름이 있다는 말은 이름에 해당하는 실제로 존재하는 분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름이 있다는 말은 그 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우리를 이미 완성된 구원을 이 땅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분으로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그 나라"라고 하는 의미는 하나님이 만드신 나라가 따로 있습니다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분명히 있고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 졌고 언젠가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비교하면 이러한 내용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 1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제 2계명: 우상을 만들지 말라
제 3계명: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 4계명: 안식일을 지켜라
제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 6계명: 살인하지 말라
제 7계명: 간음하지 말라
제 8계명: 도적질하지 말라
제 9계명: 거짓 증거하지 말라
제 10계명: 탐내지 말라
이것을 주기도문식으로 말로 바뀌면 이러합니다.
제 1계명: 예수의 이름 외에 모든 존재는 아무 가치가 없다.
제 2계명: 예수님의 이름만 남겨라
제 3계명: 예수님의 이름을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용도로 사용하 지말라
제 4계명: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제 5계명: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죄를 용서해주겠다
제 6계명: 살인한 죄를 용서해주겠다
제 7계명: 간음한 죄를 용서해주겠다
제 8계명: 도적질한 죄를 용서해주겠다
제 9계명: 거짓 증거한 죄를 용서해주겠다
제 10계명: 탐을 낸 죄를 용서해주겠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이러한 마음으로 되새기며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원래 용서받지 못할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계명을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면 그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는 죄 밖에 모르는 인간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 나의 공로와 힘으로 주기도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주기도문을 하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십자가의 공로만 의지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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