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을 부르심(마10:1-6)(50)
1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 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2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5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오늘 말씀은 12제자를 예수님이 부르시고 권능을 주시면서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명령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제가 한때 성경을 보면서 궁금해 했던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는지 참 궁금했었습니다. 믿음이 있었는지? 부르심을 받을만한 조건이 있었는지? 있다면 그게 무엇인지? 그들의 직업은 대충 알 수 있습니다만 예수님이 제자로 삼으신 어떤 기준이 있는지가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문득 제자들을 부르신 조건이 성경에 기록 되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흉내를 낼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을 얼마나 읽었는지, 집안은 어떠한지, 인격은 어느 정도인지 등등 성경에 기록되었다면 아마 이것을 제자됨의 기준으로 삼아서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할 것입니다. 흉내를 내서라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는 있지만 죄인이 어떤 조건을 만들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는 자체가 신앙과는 상반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즘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들이 거의 ‘신앙 만들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는데요. 신앙을 교회에서 만드는 프로그램으로 짜 맞추기 식으로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을 나의 주로 믿게 된다고 믿는 걸까요? 아니면 조금이라도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만약에 이 말이 맞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프로그램들을 빌려서 믿음을 갖도록 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는 무능한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안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도움은 필요치 않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조건을 따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부르심의 의미는 일손이 부족해서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된 일에 동참시키심의 의미가 있습니다.
요즘에 요리하는 방송이 많은데요. 그 중에 저는 한식대첩이라는 프로그램을 참 재미있게 봤습니다. 각 도의 요리사 두 명이 나와서 그 지방 특산물을 이용해서 주제별로 각자의 솜씨를 뽐내는 프로그램입니다. 저는 그 방송을 보면서 내내 흐믓한 마음이었습니다. 꼭 저를 위해서 음식을 만드는 듯한 착각을 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지요. 직접 맛을 보는 심사위원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심사위원들의 관심은 무엇이었을까요? 각 도의 요리사들의 성격이나 집안이나 학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들이 나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얼마나 맛있게 할 것인가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의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자질이나 인격이나 실력을 갖춘 요건이 갖추어진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24:24-25에 보시면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벨릭스라는 사람은 총독입니다. ‘두려워했다’는 말은 바울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총독이 지배하고 있는 국가 체제가 흔들릴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총독 입장에서는 사도 바울에게 ‘내 나라에서 괜히 시끄러운 일을 만들지 말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전혀 그 총독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의 일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우리의 체념이나 입장을 고려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와같이 제자들의 부르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일에 쓰시겠다고 부르시면 제자들은 사명을 감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권능까지 주십니다.
눅10:17-20에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 1절에도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권능을 거져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5-6절에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권능 주심의 목적은 병 고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을 쫓아 내는 것도 아닙니다. 권능을 자랑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오로지 참 이스라엘 백성이 되게 하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들어 낸 민족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기적의 사람들만 모인 나라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골1:13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이미 ‘건져내사’ ‘옮기셨으니’의 복을 받은 사람이 권능을 받아서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는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 제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권능을 받은 제자만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워졌다는 사실은 이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끊임없이 고난이 와도 좋을 만큼 영광스러운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쁨을 통하여 영광을 누리게하지 않으시고 왜 고난을 통하여 영광을 누리게 하실까요? 그것은 영광을 더 높이기 위함입니다. 요즘 날씨가 무더운데 내일 물놀이를 갈 예정입니다. 물놀이의 가치는 시원함에 있지요. 그런데 집에서 에어콘을 하루종일 틀어 놓고 사는 사람은 물놀이를 가더라도 시원함을 느낄수 있을까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을 한 노동자가 물놀이의 시원함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려면 우리의 삶은 고난에 처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영광은 더욱 빛이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을 거꾸로 삽시다. 헛된 영광 꿈꾸지 마시고 사탄이 주는 환상에 사로 잡히지 마시고 진정한 영광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하늘의 권능이 임했기 때문이라고 믿으신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는 줄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복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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