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고향에서 배척당하심(83)

박성산 목사 2017. 4. 24. 16:05

고향에서 배척당하심

(마13:53-58)(83)

 

53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54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 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 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 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 시니라

 

 

 

 우리가 성경을 유심히 읽다보면 유교사상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교사상은 우리나라의 5천년 역사가운데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이 사실인데 그리 될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을 위한 도덕과 윤리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 가장 보람된 것이라고 여기고 있고 자식이 커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모습은 가슴이 뭉클하기도 한 것은 가족의 소중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교회에 잘 나오다가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 발걸음을 끊는 경우를 여러 번 본 적이 있는데 가족끼리 원만하고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결정을 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됩니다.

 

성경에서는 가족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족이 오손도손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나에게 가족이 있으니까 행복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가족보다 더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면 전부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셨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했기 때문에 더 이상 메시야로서의 본질을 알려주지 않으시고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가족이 중요하십니까? 아니면 선지가가 중요하십니까? 이 둘이 함께 어울리면 좋겠는데 서로 대립되는 모습인데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가족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생각 때문에 은연중에 선지자를 배척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선지자가 제일‘이라고 생각되신다면 가족중심의 사고에서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최소단위라는 것이 있지요. 국가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민가면 됩니다만 역시 가족과 함께 갑니다. 국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가족이고 행복의 기본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아무리 크고 훌륭하더라도 나의 가족에 별로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그 나라를 떠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종교든지 나의 가족을 지켜주고 행복하게 해준다면 어느 종교라도 상관없다는 것이 사람들의 평범한 생각입니다. 우리나라에 교회가 들어와서 부흥되었다고 보는 시각은 많습니다만 사실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여러분의 가족의 행복을 기독교가 책임지겠다’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로고를 제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 가족단위로 교회에 나와서 정착을 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주로 하는 설교나 교육이 유교의 공자 가르침과 같은 맥락으로 가르쳐 왔고 교인들이 좋은 말씀으로 받아들여서 따라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교회이지만 안에서는 공자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현 교회의 실정입니다. ‘착해야 한다. 교인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 부모님께 효도해라. 양보하면서 살아라. 등등을 요구하면서 그렇게 해야 믿음이 좋은 신자’라고 강조해 온 것입니다.

 

신동엽 시인이 쓴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만 남아라’는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껍데기는 껍데기일 뿐이지 알맹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한국교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유교적인 공자의 도덕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증거한다면 아마 이런 식으로 이해를 할 가능성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가정이 불행한 것은 도덕적인 죄를 지어서 그럴거야. 그런데 십자가로서 용서를 해준다고 하니까 죄를 고백하면 우리 가정이 행복해 질거야’라고 생각하면서 하루를 반성하며 회개를 합니다.

 

아무리 강단에서 십자가를 증거해도 사람들이 절대로 포기 못하는 것은 나의 가족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다고 하는 이런 유교적인 바탕은 깨어지지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족의 건너편에 있는 선지자는 본문 57절에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라고 선지자가 존경받지 못하고 배척당하는 곳이 그 선지자의 식구와 고향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와 고향에 있는 가족과 사람들과는 서로 어울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가족은 혈연관계이기 때문에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가족이 행복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을 소망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성령이니, 하나님이니 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관심 밖입니다.

 

매년 1월1일 해뜨기 전에 정동진에 가보시면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있어요. 정월 대보름에는 유명하다는 산에 사람들이 올라가서 달을 쳐다보며 기도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정의 안녕을 위해서’

 

교회에서는 매년 수능을 앞두고 몇 달 전부터 ‘기도회’를 하기도 합니다. 집안에 시합을 앞두고 있는 자식이 있으면 교회나 절에 가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메달 따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이와같이 만약에 예수님께서 가족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서 오셨더라면 자기 가족과 고향 사람들에게 대환영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만 해주면 행복할 테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배척당하고 말았습니다.

 

 마8:21-22에 보시면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교적인 바탕에서 이 말씀을 보면 너무 냉정한 말씀으로 보입니다. 어떤 제자가 예수님에게 부친의 장사를 허락하게 해달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장사는 죽은 자들이 장사하게 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의 일을 할 수밖에 없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생명을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00년을 살더라도 죽음은 죽음이요, 200년을 살더라도 죽음은 죽음입니다. 설사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할 텐데 내 가족의 복을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면 엉터리 같은 예수님을 섬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앙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판단기준을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있다면 자기의 가족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과연 하나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곤란합니다.

 

삼하 17장에 보면 다윗이 자기 아들과 싸웁니다. 압살롬이라는 아들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모의를 하는데 다윗에게 이 사실을 알려서 빨리 피신하도록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다윗에게 알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소년이 이 장면을 보고 압살롬에게 고해서 그들을 붙잡으러 갑니다. 마침 어느 여인의 집에 있던 우물안에 숨어서 그들은 무사히 목숨을 건졌고 다윗은 그 덕분에 살 수 있었습니다. 압살롬의 입장에서는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은 배신자입니다.

 

또한 수2장에 보면 기생 라합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탐꾼이 자기의 집에 찾아 왔을 때에 자기 집에 숨겨두고 정찰병들이 수색하러 왔을 때에 자기 집에는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정탐꾼에게 산에서 3일 동안 숨어 있다가 빠져나가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는 당신들이 다시 오면 그때 나를 기억해달라고 말합니다. 라합은 거짓말을 하고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거짓말이 옳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라고 하는 것을 나와 가족을 위해서 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선과 악은 하나님을 위해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선이지만 나와 가족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한다면 모두 악한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목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선일까요? 아니면 악일까요?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로만 기억한다면 그들은 구원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육적으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적인 관점은 결국 선지자와 그의 말을 우습게 볼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요일4:13에 보시면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혼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늘 동고동락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진정 가족은 누구일까요?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나 라합에게는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과 나라까지 배신을 했을까요?

 

그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과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심지어 부부사이라도 성령을 받지 못한 관계라면 서로 단절될 수밖에 없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족은 천국 가는데 필수조건이 아니라 성령을 받고 못 받고 차이인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것은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희생과 용서가 어떤 것임을 보여주는 모델로서 남편과 아내와 자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7:10-13절에 ‘불신자인 상대가 복음 때문에 못 살겠다고 강제로 헤어지자고 할 때는 원하는 대로 해주라 또한 상대방이 함께 살기를 바라면 버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혈육을 능가하는 성령의 세계에서 오신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가족편이십니까? 아니면 선지자편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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